이강동
이강동

조선이 일본 정부에 포구를 개방해 준 시기가 있었다. 일본인들의 거주를 허가해 주기도 했다. 부산포·제포·염포·울산의 염포·전남의 고초도 해역을 일본에 개방했다. 일본 정부 사절단과 상인, 어민들에게 문호를 활짝 열어 준 것이다. 이들 포구는 일본과의 해운교통에 요충지였다. 개방해 주면서 조선의 법률과 규칙 등을 지키고 거주지역 외에는 불법으로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 

개방된 포구로 찾아와 상륙 허가를 받고 거주한 일본인들이 늘어나면서 부산 초량지역에는 동평관(왜관·화관)이라 불린 일본인 거류지역이 있었다. 조선으로 오가는 선박들이 늘어나자 큰 선박은 40명, 중선은 30명, 작은 선박은 20명을 승선 정원으로 한다는 규칙도 정했다. 포구의 개방으로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1400년 초 일본인 거주자는 3천 명이었다. 농사를 할 수 없었던 큐슈 등 여러 지역 일본인들이 어염 등을 가지고 와 우리 곡식들과 물물교환하기도 했다. 이런 딱한 사정으로 매년 쌀을 무상으로 보내 줄 정도로 선린 정책을 폈던 조선은 임진왜란이란 뒤통수를 맞고 교류를 단절한다. 1607년과 1870년 일본의 교류사절단을 거절한다. 

1872년 8월 일본은 교류를 위해 특사 하나부사를 부산으로 보낸다. 병력을 가득 태운 군함 2척을 이끌고 부산에 도착한다. 일본 정부 특사가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왔다는 소식이 전국에 알려졌다. 동래부사 정현덕은 동평관의 문장과 소통사에게 전령을 보내 일본인들의 외부 출입을 막고 식료품 판매를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나부사는 이런 소식을 일본 정부에 통지한다. 정한론이 있는 일본 정가는 정한론 논의가 더 활발해진다.

대원군이 은퇴하고 개혁파와 교섭 끝에 1876년 한일수호조규가 체결된다. 일본 정부는 인천 제물포에 항구를 건설하고 모든 권리는 일본 정부가 갖는다고 발표했다. 1872년 부산으로 군함을 이끌고 왔으며, 임오군란 때 서울과 인천시민들에게 공격 당하고 겨우 피신해 월미도에서 어선을 탈취해 일본으로 도망갔다 다시 일본군 병력을 이끌고 제물포로 상륙한 하나부사를 일본 정부는 항구 건설의 책임자로 임명한다. 하나부사는 조선 주재 초대 일본 영사이기도 했다.

제물포는 동구 만석동~중구 해안동에 이르는 바닷가 중심지다. 당시 모두 만석동 지역이었다. 우리의 역사와 함께하면서 문호가

활짝 개방됐던 제물포에 항구를 건설한다며 낯선 명칭인 개항장 지정을 발표하자 전 국민이 반대하고 나섰다. 경상도 영가(안동)에서 시작해 전라도·충청도·강원도·경기도·인천시민들이 개항장 지정을 반대했다. 1881년 1월이었다. 

옛 군사기지였던 북성포대와 북성포구의 연원을 가진 고유 지명 북성동을 개항동으로 바꿨다. 모두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북성동 지명을 내팽개치고 일제 잔재인 개항동으로 바꾼 것이다. 잘못됐다. 개항로라는 도로명주소도 생겼다. 목소리를 내지 않고 점잖게 있는 개항동 주민들은 자신들의 집주소 지명이 일제 잔재라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북성동으로 다시 환원시켜야 한다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많다. 주민들은 시민 모두가 아는 북성동으로 다시 부르자고 주장한다. 일제 잔재 지명인 개항동·개항로에 미련을 두지 말고 북성동으로 환원시켜 주민들의 자존을 지켜줘야 한다. 주민들을 위한 해당 구청의 담담한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많은 주민들이 바란다. 

142년 전 일본 정부가 지정한 개항장은 우리의 각종 물품들을 약탈해 일본으로 반출한 현장이다. 치욕의 현장이었던 개항장 명칭을 행정동명으로 사용하고, 개항장이라는 축제까지 있다는 사실에 시민들은 물론 개항동 주민들은 낯뜨겁다고 했다. 일본 군병력이 들락날락했던 치욕의 현장 개항장 명칭을 마을 지명으로 사용하는 우리는 너무나 노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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