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석 인천대 명예교수
이재석 인천대 명예교수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도 어언 100년이 지나 올해는 104주년이 되는 해다. 

중앙아시아 동북부의 위구르족이나 서남부의 쿠르드족이 자기 민족의 국가를 갖지 못해 국가 없는 민족으로서 감수하는 상실감과 국가 있는 민족이지만 자주독립을 지키기 위해 온갖 참화를 감수하며 오늘도 항전하는 우크라이나인의 비극에 비춰 볼 때, 대한민국이란 민족의 국가를 가진 한국인에게 대한민국 탄생의 기폭제가 된 3·1 독립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흐르는 세월과 무관하게 늘 새겨야 할 만큼 크고도 드높다.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다양하게 꼽을 수 있으나, 필자는 크게 독립운동사상 ‘원조(元祖)독립운동’이란 위상과 대한민국이란 근대국가 건설의 시발점이었다는 ‘기폭제’ 노릇을 역사적 의의로 꼽으려 한다.

3·1운동은 조선 말기 이래 서양과 일본의 침략에 대응해 등장한 척사위정(斥邪衛正)사상, 동학(東學)사상, 개화(開化)사상 등등의 이념에 따라 여러 갈래로 전개되던 애국·독립운동 세력이 처음으로 거족적 대동단결해 한민족의 독립의사와 의지를 세계에 알렸고, 이후 독립운동에 에너지를 부여해 국내에서는 문화운동, 노동운동 그리고 농민사회운동이 지속 일어나게 했고, 해외에서는 자주독립운동이 전개되도록 했다. 이 때문에 3·1운동은 일제강점기에 전개된 독립운동 가운데 원조가 되는 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3·1운동은 한국이란 일국사적 차원을 넘어 중국 5·4 운동의 선구가 되고, 인도의 네루가 딸에게 소개할 정도로 인도 독립운동에 영향을 끼쳤듯 식민지 약소민족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자극제가 됐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민족운동 위치에 있다. 

운동을 이끈 이념은 ‘3·1독립선언서’와 ‘공약3장’에 집약됐는데, 널리 알려졌듯 그 핵심은 자유주의, 민족주의, 평화주의다. 이들 이념은 당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보편성을 갖는다.

3·1운동 결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시정부는 대한제국과 달리 군주제와 결별하고 주권재민의 공화정 정체(政體)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국가 체계를 설계했다. 3·1 봉기와 거의 동시에 발행된 ‘조선독립신문’ 제2호(1919년 3월 3일자)는 ‘국민대회’란 절차를 거쳐 ‘공화정’ 체제의 ‘임시정부 수립’을 알린 바 있는데, 이는 임시정부 수립이 3·1 독립운동의 직접적 결과임을 보여 주는 징표다. 

이후 1919년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 중국 상하이, 서울에 각각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이들 임시정부가 그해 9월 6일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면서 한국 국민을 대표하는 대표성과 3·1운동을 계승하는 법통을 갖게 됐다.

3·1운동 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게 됨으로써 한국의 근대국가 체제가 태동했고, 1948년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건국이 완결됐다. 진실로 대한민국 건국 역사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잉태해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으로 근대국가가 탄생하기까지 30년이란 긴 과정이었으되, 그 기폭제가 된 것은 3·1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3·1운동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원조이자 대한민국이란 근대국가 건설의 ‘기폭제’가 되는 민족운동으로 평가할 만하다.

국가를 가진 민족은 축복 받은 민족이고, 번영하는 국가의 민족은 더욱 축복받은 민족이다. 인구가 5천만 명을 넘고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는 번영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은 분명 축복받은 민족이다.

번영하는 국가를 갖게 된 오늘의 축복은 원조 독립운동인 3·1운동 이래 풍찬노숙하며 자주독립 쟁취와 국가 건설을 위해 몸 바친 선열과 조상의 희생 덕택이기에, 그 공덕을 오래오래 기려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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