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에 실린 인도의 시 한 편이 제 가슴에 묵직한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옷 한 벌을 빌려주었는데 나는 그 옷을 평생 잘 입었다. 때로는 비를 맞고 햇빛에 색이 변했고 바람에 어깨가 남루해졌다. 때로는 눈물에 소매가 얼룩지고 웃음에 흰 옷깃이 나부끼고 즐거운 놀이를 하느라 단추가 떨어지기도 했다. 나는 그 옷을 잘 입고 이제 주인에게 돌려준다."

돈과 권력이나 명예 따위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불과합니다. 빌린 옷일 뿐입니다. 죽을 때는 아무 소용도 없는 그것을 하나라도 더 많이 쥐기 위해 평생을 애썼던 겁니다. 이제 죽음 앞에서 그것 모두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시인의 통찰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그것들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 그것을 손에 쥐었을 때는 무척이나 기뻤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결혼 승낙을 받았을 때, 아이가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 어렵사리 학위논문이 통과됐을 때는 세상 모든 것을 다 쥔 듯했고, 이제부터는 기쁜 일만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빌린 옷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사소한 일로 부부는 다퉜고, 아이가 커 가면서는 걱정거리도 늘어만 갔고, 학위 취득 이후에는 말과 글에 대한 책임감이 어깨를 더욱 짓누르곤 했습니다.

옷은 필요합니다. 다만, 그 옷을 입되 그것과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을 알면 입고 있을 때 옷을 깨끗이 다루고 돌보게 될 것입니다.

「내일이 보이지 않을 때 당신에게 힘을 주는 책」(장바이란)에 시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무원을 정년퇴직하고 시의원에 출마했지만 딱 3표차로 고배를 마신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의 말입니다. "내가 그 스트레스 때문에 암에 걸렸어요. 수억 원을 날리고 남은 것은 병밖에 없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세 표차가 무슨 소용이고 시의원은 왜 하려고 했는지."

무척 억울했을 겁니다. 차라리 많은 표 차이로 떨어졌다면 이렇게 큰 상처로 남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당선됐다면 과연 행복했을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 즉 삶의 목적을 ‘시의원 당선’에만 뒀다면 행복과는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합니다. 그러나 삶의 목적을 시민에 대한 진실한 ‘사랑’에 뒀다면 이야기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시의원 당선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기 때문이고, 목적은 변함없어도 수단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하철을 타고 서울에 가서 친구를 만난다고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목적은 친구를 만나는 것일 테고, 목적을 달성할 수단은 지하철일 겁니다. 그런데 만약 지하철이 고장으로 운행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요?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 만나러 가면 됩니다. 그러니 수단이 바뀐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야기 속 주인공이 ‘당선’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겼다면 훨씬 더 수월하게 낙선의 후유증을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평생을 공직자로 살아온 자신의 경력으로 행정력이 미치지 못한 곳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소외계층을 돕는 일에 앞장서거나 관청에서 서류 작성에 어려움을 겪는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을 해 나간다면, 운행이 중지된 지하철 대신 버스를 선택한 것처럼 ‘시의원 당선’이 ‘봉사활동’으로 바뀌어 그의 삶의 목적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고, 결국에는 꽃을 피우게 될 겁니다.

재산이나 권력이나 명예는 삶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나 수단이 마치 삶의 목적이라고 착각하면 ‘나’와 ‘너’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어 버리는 흉기가 돼 버립니다. 그것들은 단지 빌린 옷처럼 영원히 내 것으로만 남지 않을 것이기에 그것을 누리고 있을 때 오히려 깨끗하게 돌봐 다음 주인에게 전해주겠다는 생각이 멀리 떨어져 있던 행복을 부르는 열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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