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휘 정치학박사
장순휘 정치학박사

올해는 미주 이민사 120주년이 되는 해다. 물론 공식적인 이민 역사는 구한말의 불안한 정세로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를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으로 이주도 본격화해 재일동포사회가 형성됐다. 그리고 1937년 스탈린 정권의 한인이주정책으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강제 이송되면서 중앙아시아로 한인동포사회가 확장됐다. 

건국 후에는 중남미 농업이민으로 브라질과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지로도 이민이 이어졌다. 특히 1963년 파독 광부의 첫 노동 이주를 시작으로 1966년 파독 간호사 파견이 이어지면서 재독 한인동포사회가 형성됐다. 현재 제2·3세들이 정치계와 경제계, 학계 등 전 분야에 걸쳐 왕성한 활동으로 유럽과 독일 속에서 한국인의 우수성과 근면성을 빛낸다.

1902년 12월 22일 조선 최초로 하와이 첫 이민자 121명이 인천 제물포항에서 떠났다. 당시 일본 배(겐카이마루)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항으로 2일간 항해했다. 12월 24일 나가사키 검역소에서 신체검사와 예방접종을 받는 과정에서 19명이 탈락했다. 그래서 하와이로 가는 미국 태평양 횡단 기선 갤릭호(S.S.Gaelic)에 탑승한 인원은 102명으로,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다시 검역과 입국 절차를 마치고 협궤열차에 탑승해 오아후섬 와이알루아(Waialua)농장 모쿨레이아( Mokuleia)에서 낯선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매년 1월 13일을 미주 ‘한인의 날’로 법정 공식기념일로 선포해 기린다.

1905년 하와이에는 65개 농장에 5천여 명의 한인노동자들이 다른 민족들과 함께 생활했다. 사탕수수농장에서는 십장(什長)인 ‘루나’의 감시를 받으면서 뜨거운 햇볕 아래서 힘겨운 중노동의 삶을 견뎌야 했다. 당시 1905년까지 성인 남자의 월급은 17달러였으나 여자와 소년은 하루 50센트로 노동환경이 열악했다. 그러나 한국인 특유의 ‘은근과 끈기’로 농장의 규칙적인 생활을 견뎌 내면서 정착했다. 그 후 추가적인 이민자 유입으로 본격적인 초기 한인사회가 형성됐다.

이런 미주(멕시코) 이민사의 애환을 다룬 영화가 ‘애니깽(Henequen)’(1996년)이다. 애니깽은 용설란(龍舌蘭)의 품목으로 헤네켄(Henequen)의 스페인식 발음인 ‘에네켄’을 한국인 노동자들이 ‘애니깽’으로 사용하면서 붙여진 한국 노동자의 별칭이다. 농장관리인과 감시인들의 학대와 무더위 속에서 고된 노동을 견디고 인종차별을 감수해야 했던 20세기 초 한국인의 이민사를 재조명한 작품이다.

현재 해외 한인동포 인구는 약 750만 명으로 추산한다. 세계 각국에서 국위를 선양하는 재외동포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정책적 지원과 전문 관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가 됐다. 지난달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외교부 산하에 ‘재외동포청’을 설치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통과된 것을 환영한다. 그렇다면 신설된 재외동포청 유치는 이론의 여지 없이 인천광역시가 적임지라고 제안한다. 우선 유정복 인천시장이 적극적이기도 하지만 시정목표가 ‘시민이 행복한 세계 초일류도시 인천’으로서 인천시 7대 주요 시책으로 ‘재외동포청 인천 유치’를 추진해 왔다는 점이다.

지난해 11월 11일 유럽한인총연합회(회장 유제헌)와 양해각서를 체결해 지지했고,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연합회도 지지했다. 2월 22일에는 하와이 교민들도 재외동포청 인천 유치를 선언했다. 유정복 시장은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기까지 재외동포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 중심에 이민사의 출발점인 인천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이민사의 출발지인 재외동포청의 인천 유치를 선언했다. 

당연한 것이 입지적 조건인데, 해외동포들이 공항으로 입국과 동시에 편리하게 접근 가능한 도시는 인천시다. 국제적 수준의 초일류 도시 인프라가 구축됐고, 서울과도 근거리로 비즈니스에도 적합한 인천시에서 재외동포청을 유치하면 불필요한 국력 낭비가 없는 적합하고 합리적인 결정이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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