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일제 강점 하 강제 동원 피해자 배상을 일본 전범기업이 아닌 우리 정부 산하재단이 부담하기로 한 이른바 ‘제3자 변제’안을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에 공식 제시한 것을 두고 정부·여당은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호평하는 반면 야당과 다수의 국민 여론은 "최악의 굴종외교"라고 비판한다. 법적 관점에서 이 사안의 문제점을 몇 가지만 지적해 본다.

첫째, 절차적 측면에서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어떤 방침을 결정하려면 사전에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치는 것이 민주주의 원리에 합당하다. 법령은 물론이고 작은 단체의 내부 규범(정관, 규정 등)을 제·개정할 때에도 구성원의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친다. 그런데 한일관계에 미칠 중요한 정책방향을 결정함에 있어서 사전에 충분한 의견 수렴과 공론화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국회를 통한 논의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는 ‘중대한 절차적 흠결’이 될 수 있다. 

국민 다수의 의견을 거역해 특정인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는 것은 비민주적이다. ‘제3자 변제’안을 제안하자 일본 정부 측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제3자 변제는 내가 생각해 낸 것이고,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고 말했다는데, 국민들은 이런 태도에 매우 심각한 우려의 눈길을 보낸다.

둘째, 실체적(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먼저 공법(公法)적인 측면을 보자. 독립국가가 향유하는 ‘주권(主權:sovereignty)’이란 "국가의 의사를 최종 결정하는 권력으로서 대내적으로는 최고의 절대적 힘을 가지고 대외적으로는 자주적 독립성을 가진다"고 설명된다. 과거 봉건주의 시대에는 ‘군주주권론’이 대세였으나 근대 민주주의가 태동된 이후에는 ‘국민주권론’이 일반적이다. 

주권에는 입법주권·행정주권·사법주권이 모두 포함되는데, 국가의 모든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뜻이 절대적으로 존중되고 관철돼야 한다. 특히나 헌법의 틀 안에서 정당한 절차를 거쳐 선고된 대법원 판결의 취지와 효력을 무력화시키는 의사결정을 할 권한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대통령은 "2018년 대법원 판결에는 모순과 문제점이 있다", "(일본 피고 기업에 대한) 구상권 행사는 상정하고 있지 않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하다. 

한국의 대통령이 한국 최고 법원의 판결을 무시·폄훼하는 것은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의 외교행위도 ‘행정’의 일환이므로 ‘법치행정주의’ 틀 안에서 이뤄져야 법적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따라서 대법원 판결의 취지와 효력을 무력화시키는 대통령의 외교행위는 ‘행정은 법의 틀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헌법적 요청과 취지(법치행정주의, 3권분립의 원리 등)를 위배했다고 봐야 한다.

다음으로 사법(私法)적인 측면을 보자. 민법 제469조 제1항은 "채무의 변제는 제3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규정한다.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에 소송을 제기한 건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 식민지배·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 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을 행사한 것’이므로 그 심각한 반인륜적 인권침해에 대한 배상 의무의 성질은 ‘제3자 변제’의 법리를 적용하는 데 적합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청구권인 ‘채권’은 지배권인 ‘물권’과 달리 기본적으로 인적 속성을 지니므로 ‘변제 그 자체’보다 ‘누구에게 변제 받는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법적 이해관계 없는 제3자가 관여할 사안도 아니다. ‘증여’도 증여자의 ‘청약’ 외에 수증자의 ‘승낙’이 있어야 성립되는 ‘계약’이 아니던가. 한편, 피해자들은 ‘제3자 변제’에 거부 의사를 ‘명백히’ 표명했다. 따라서 ‘제3자 변제’는 성립될 수 없다(불가능). 사인(피해자) 대 사인(가해기업) 간 권리 다툼에 국가(행정부)가 어설프게 개입하는 건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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