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정답은 하나밖에 없다고 배워 왔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와 다른 것은 모두 ‘틀린’ 것으로 여기고, 없애야 할 ‘적’으로 판단합니다. 그 결과, 편협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돼 세상 곳곳에는 갈등과 분열과 소음으로 가득해졌습니다.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합니다. 자신과 다른 것은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름’에서 얻을 수 있는 배움의 기회를 스스로 내던집니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이렇게 편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동심을 잃어버려서 그런 건 아닐까요? 동심은 ‘호기심’이고, 호기심으로 세상을 보면 그 어떤 것에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물질을 몰랐습니다. 무엇이 비싸고 무엇이 싼지 모릅니다. 누가 높고 누가 낮은지도 모릅니다. 그저 모든 게 신기하고 재미있는 놀잇감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물질에 익숙해지고, 권력을 탐하게 되고, 명예에 마음이 쏠립니다. 그것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 마침내 삶의 기준이 돼 버립니다. 이때부터 좋음과 나쁨, 옳고 그름 또는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유리한지 아닌지로 구분할 뿐입니다. 그래서 정답이 마치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정답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긍정력 사전」(최규상)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경기가 나빠지자 구둣방에서 닦지 않고 집에서 닦았다. 한 구두닦이가 아이디어를 냈다. 문 앞에 이런 안내문을 붙였다. ‘구두 한 짝은 완전 무료로 닦아드립니다. 나머지 한 짝은 2천500원입니다.’" 경기 불황으로 장사가 되지 않자 절망 대신에 이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 구두닦이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따뜻한 영혼을 위한 101가지 이야기 2」(잭 캔필드)에 두 명의 스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지를 순례 중인 두 스님이 어느 강가의 여울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아름답게 차려입은 한 여인이 깊은 물을 어떻게 건너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걸 보았다. 그녀는 옷이 젖을까 걱정이었다. 그래서 스님 한 분이 그녀를 등에 업고 강을 건너서 반대편 마른 땅에 내려주었다. 그리고 스님들은 가던 길을 계속 갔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동행하던 스님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인을 만지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네. 여인과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계율에 어긋나지 않나? 어떻게 자네가 그런 불가의 규율을 어길 수 있단 말인가?’

여인을 업어준 스님이 조용히 걷다가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벌써 한 시간 전에 그녀를 강가에 내려놓았는데, 자네는 왜 아직도 그녀를 업고 있는가?’"

‘승려는 여인의 몸을 만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답이라고 배워 왔을 겁니다. 계율은 누군가를 진실한 마음으로 돕기 위한 약속입니다. 여인이 도움을 청할 때 ‘만져서는 안 된다’라는 계율과 ‘도와야 한다’는 계율의 목적 사이에서 당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율은 목적을 위한 ‘수단’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적(사람을 돕는 것)을 구현하려 한다면 수단(여인을 만져선 안 된다)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한 스님은 소녀를 ‘여인’으로 봐서 ‘안 된다’라고 했고, 다른 스님은 그녀를 ‘사람’으로 봐서 업어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스님이라고 해도 선뜻 그녀를 업고 강을 건너겠습니다.

정답이 하나밖에 없다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세상은 갈등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이제까지 세상을 바라보고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던 기준을 한번쯤은 찬찬히 들여다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비로소 내가 마음속 깊고 깊은 철창 속에 갇혀 있었음을 깨닫게 되고, 그때 비로소 새로운 정답을 찾는 행복한 여정이 시작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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