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누구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합니다. 무엇 하나에도 얽매이지 않고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본능일 테니까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자유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유인으로 살아가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얽히고설켜서 내 뜻대로만 살 수 없는 게 우리네 삶일 테니까요.

자유는 말 그대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동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면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는 ‘지족(知足)’적이어야 합니다. ‘지족’이란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아는 것’을 뜻합니다. ‘분수를 지킨다’는 말은 사물을 분별할 수 있다는 뜻이므로, 지족적인 사람은 자유롭게 행동하면서도 남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에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저는 ‘자유인’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자유인이 하는 행동은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요? 나는 내가 그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했을 뿐인데, 그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한 것으로 이어진다면 이런 사람을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나도 즐겁고 남도 기쁘게 하는 사람입니다. 나에게도 좋고 너에게도 좋은 이런 상태를 지족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불교에서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부릅니다. 사전에 따르면 도를 닦는 마음이 뛰어나 지위를 달 수 없을 만큼의 경지에 오른 참된 인간을 무위진인이라고 합니다. 무위진인의 한 분으로 추앙받는 임제 스님의 일화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장웅연)에 나옵니다.

스님이 대중에게 말했습니다. "붉은 몸뚱이에 한 사람의 무위진인이 있다.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이들은 잘 살펴보길 바란다."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스님, 어떤 것이 무위진인입니까?" 그때 스님이 돌연 법상에서 내려와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말했습니다. "말해보아라. 어떤 것이 무위진인인가!"

그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스님은 그를 거세게 밀쳐 버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위진인은 무슨 개뿔. 마른 똥 막대기 같으니라고!"

대단하신 스님입니다. 무위진인은 더 이상 오를 수 없을 만큼 깨달은 사람이라 모든 존재를 차별하지 않는 그런 사람일 텐데, 그런 사람을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도 없는 ‘개뿔’이나 ‘마른 똥 막대기’라며 무시해 버리니까요. 그러나 사실은 스님이 무위진인을 폄하하는 말이 아니라, 질문하고 있는 ‘너’가 바로 무위진인이고 무위진인이어야 하는데 왜 그런 걸 물어보느냐고 꾸짖는 겁니다. 무위진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남에게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개뿔이나 똥 막대기처럼 부질없고 가치 없는 짓이라고 말입니다. 마치 자동차 열쇠를 자기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열쇠가 어디 있냐고 남들에게 묻고 있으니, 스님이 보기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똥 막대기’나 ‘개뿔’ 같은 사람이 아니겠어요.

그렇습니다. 자유인, 즉 무위진인은 바로 ‘나’여야 합니다. 나의 얼굴을 통해서, 나의 손과 발을 통해서 무위진인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얼굴과 손발은 곧 스스로의 인격을 보여 주는 도구입니다.

무위진인이나 자유인이라고 하면 흔히 성직자나 자연인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그런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차별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고 손과 발을 선뜻 내미는 그런 사람들이 바로 무위진인이고 자유인일 테니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도 좋고 ‘너’에게도 좋은 사회, 즉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열쇠이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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