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 인천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시인
이태희 인천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시인

최초의 문명 발상지 수메르가 전해 준 최초의 신화,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쉬 서사시」를 읽었다.

서양 문학의 앞자리를 차지해 온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오디세이아」가 쓰인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2천700~2천800년 전이라고 하는데, 「길가메쉬 서사시」는 이보다 약 2천 년이 앞선다고 한다.

이 최초의 서사시에는 성서와 그리스신화 전승에서 볼 수 있었던 ‘신을 닮은 인간의 창조’, ‘여자의 유혹과 성’, ‘신들만 가지고 있던 지혜의 습득’, ‘대홍수 이야기’ 등이 담겼다.

주인공 ‘길가메쉬’라는 이름의 어원을 살피면, 수메르에서 ‘빌가메쉬’로 불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빌가’가 ‘늙은이, 조상’이라는 뜻을, ‘메쉬’가 ‘젊은이, 영웅’이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즉, 인간으로 태어난 길가메쉬가 영생을 갈구했음에도 늙은이에서 젊은이로 되지 못하고, 젊은이에서 늙은이로 돼 결국 죽음에 이르는 영웅의 운명이 함축된 이름이라고 한다.

신화는 길가메쉬가 3분의 2는 신이었고, 3분의 1은 인간이라고 반복 서술한다. 그의 아버지 ‘루갈반다’는 수메르의 도시국가 우르크 제1왕조의 3대왕이며, 어머니 ‘닌순’은 들소의 여신이다. 

인간 왕과 여신 사이에 태어난 영웅이라는 점에서 그리스신화의 아킬레우스가 연상된다. 흔히 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존재를 반신반인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영웅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인간 아버지와 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길가메쉬의 품격을 왜 3분의 2는 신이고, 3분의 1은 인간이라고 표현할까?

신화의 문장은 따로 설명이 없기에 진의를 알 수는 없지만, 인간보다 신에 가까운 영웅적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듯하기도 하고,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강력한 영향력을 인정치 않을 수 없는 모계사회 전통의 반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 필자의 주목을 끈 에피소드 중 하나는 길가메쉬가 ‘사랑과 전쟁의 여신’이며, ‘하늘과 땅의 여왕’인 이쉬타르의 청혼을 거절하는 이야기다.

초야권을 행사하는 등 처음에 폭군으로 그려진 길가메쉬와 대적하기 위해 신들이 엔키두라는 야생적 영웅을 창조했는데, 대결을 펼치던 길가메쉬와 엔키두는 친구가 되고, 둘은 서로 힘을 합쳐 삼목산의 산지기 괴수 훔바바를 제거하고 돌아오게 된다.

이때 귀환한 길가메쉬가 제왕다운 복장으로 갖추고 왕관을 썼을 때, 이쉬타르가 온갖 선물을 약속하며 자신의 남편이 돼 줄 것을 간청했다. 

길가메쉬는 이쉬타르 여신이 그간 신랑으로 삼은 자들 중 영원히 남아 있는 자가 없다며, 이전 남편들에 대한 그녀의 온갖 만행을 들추며 청혼을 거절했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쉬타르는 하늘로 올라가 신들의 아버지 ‘아누’에게 자신이 받은 모욕에 보복하기 위해 하늘의 황소를 내려 달라고 했다. 

그 하늘의 황소가 내려와 유프라테스강의 엄청난 물을 마셔대자 강 수위가 7완척이나 낮아지고, 콧김에 의해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우르크의 젊은이 100명에 그곳에 빠지는 등의 사태가 일어났다.

이번에도 길가메쉬는 엔키두와 힘을 합쳐 이 엄청난 하늘의 황소를 죽여 버렸다. 게다가 엔키두는 저주를 퍼붓는 이쉬타르의 얼굴에 황소의 허벅다리를 찢어 던졌다. 이로 인해 신들의 저주가 이어졌고, 결국 엔키두가 죽게 됐다.

엔키두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빠진 길가메쉬는 영생의 길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우여곡절 끝에 불사의 식물을 얻었으나 어이없게 뱀에게 그것을 빼앗겨 버리고 돌아온 영웅 길가메쉬도 결국 숨을 거둔다.

인류 최초의 신화가 불멸의 사랑이나 세계의 유토피아적 전망을 그려 내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아무도 ‘죽음’을 넘어설 수 없다는 엄정한 운명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에 숙연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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