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흔히 ‘배가 불러야 남도 돕게 된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사람들을 선뜻 돕는 뉴스를 보면서 이 속설이 꼭 맞는 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곤 합니다. 

이런 깨달음을 존 스타인벡의 장편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도 발견합니다. 「내 영혼의 산책」(박원종)에서 저자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소개합니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절, 사람들은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분노하고 슬퍼하며 더 이상 희망은 없다고 좌절하면서 무참히 쓰러집니다.

친정 식구들과 함께 처량한 유랑민 신세가 돼 서부로 가던 젊은 여인, ‘샤론의 장미’는 길을 가다가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빈사 상태로 길가에 쓰러진 50대 사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내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굶주리고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낯선 사람의 그런 모습이나 고통이나 불행쯤은 쉽게 외면해 버려도 그만인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 사내 곁으로 갔습니다. 빈사 상태에 빠진 낯 모르는 사내를 살며시 자기 품 안에 안았습니다. 마치 얼마 전에 죽은 자신의 아기에게 젖을 먹이듯 자신의 흐벅진 가슴을 풀어 그에게 젖을 먹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품 안에 안긴 채 어린아이처럼 젖을 빠는 그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기쁨과 환희에 찬 신비로운 미소를 짓습니다.

이 여인의 행위를 보고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왠지 뿌듯한 느낌이 들고 기분까지 좋아지지는 않나요? 우리가 아무리 어렵게 산다고 해도 손발만 움직일 여력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일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선뜻 내미는 일이 지극히 사소하다고 해도 쓰러져가는 사람에게는 사막에서 물 한 모금과 같은 축복이 됩니다. 놀랍게도 도움의 손길을 받은 그 사람은 자신이 받은 사랑을 또 다른 이들에게 베풀면서 꽃을 피웁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인성 이야기 111가지」(박민호)에 좋은 사례가 나옵니다. 

옛날,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노예시장에 어린 노예가 나왔습니다. 소년은 먹지 못해 뼈만 앙상하게 남았고, 몸이 아주 작아 값을 매길 방법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겨우 담배 열 갑에 팔려 노예선에 실렸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항해 도중 영국인의 손에 넘어가 다행스럽게도 모두 자유의 몸이 됐고, 소년은 영국에서 자랍니다.

세월이 한참 흘러 런던 성당에서 성대한 미사가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는 신부님과 주교님, 대주교님, 그리고 귀족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나이지리아로 파견되는 첫 주교의 임명식이 열리기 때문이었습니다. 담배 열 갑에 팔렸던 어린 노예가 바로 그 주교였습니다. 어질고 배려 깊은 영국인의 사랑이 이렇게도 자랑스러운 신부로 성장했지요.

이 글을 쓰면서 장 루슬로 시가 떠오릅니다. 이기심으로 가득 채워진 제 가슴을 마구 흔들어 깨우는 시입니다.

‘작은 바람이 말했다. 내가 자라면 숲을 쓰러뜨려 나무들을 가져다 주어야지. 추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빵이 말했다. 내가 자라면 모든 이들의 양식이 되어야지. 배고픈 사람들의./ 그러나 그 위로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비가 내려 바람을 잠재우고 빵을 녹여 모든 것들이 이전과 같이 되었다네. 가난한 사람들은 춥고 여전히 배가 고프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아. 만일 빵이 부족하고 세상이 춥다면 그것은 비의 잘못이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 작은 심장을 가졌기 때문이지.’

맞습니다. 제가 그동안 너무 작은 심장을 가졌기에 그동안 어려운 이웃을 보면서도 못 본 척했습니다. 제 이기심은 늘 제 이타심을 강력하게 억누릅니다. 그래서 저는 선뜻 죽어가는 낯선 사람에게 젖을 내어준 샤론의 장미나 어린 노예에게 자유를 준 영국인과는 달리 이제껏 베풀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이 죄스러운 마음이 내일의 제 삶을 바꾸어주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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