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봄비의 느낌은 다양하다. 얼마 전 내린 봄비는 달콤했다. 잎보다 먼저 핀 꽃 세상을 연초록 잎 세상으로 바꿀 만큼 황홀했다. 이내 가슴에 젖어 있다. 보이지 않는 신의 손길이 작용한 듯 신비롭다. 당분간 흐드러진 꽃 세상과 잎 세상이 서로 앞다퉈 새봄 한마당 잔치를 벌일 기세다. 

보통 ‘봄비’는 봄철에 가늘면서 소리 없이 내리는 비를 말한다. 이슬비·가랑비·는개비·보슬비 같은 시적인 이름들이 봄비에 보다 잘 어울린다. 봄비는 뭇사람들이 좋아할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의 창작 제재로도 손꼽힌다. 시인, 작곡가, 화가, 삽화가, 사진사, 프로듀서 등 누구나 쉬이 관심을 가질 만하다. 시중에 봄비 관련 시 모음이나 노래 모음이 인터넷을 달구니 말이다. 

김소월과 박목월이 지은 시 ‘봄비’는 ‘서럽고 애달프며 슬프다’고 했다. 1970년 한국 최초의 소울풍 가수 박인수가 부른 ‘봄비’는 빗방울을 ‘외로운 눈물’이라 했다. 이 유행가는 반세기 넘은 지금도 애창된다. 김추자·장사익·하현우·알리 같은 개성적 창법의 명가수들이 다시 불렀다. 이런 비애나 고독이 봄비의 보편적 느낌일 수 있다. 혹은 시어나 가사의 역설적 표현일 수 있다. 다만, 비애나 고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나 노래로 인해 카타르시스를 맛볼 때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번 봄비는 왠지 바로 열락과 희망으로 와 닿는다. 첫사랑 만남처럼 신선하다. 처음 접하자마자 가슴이 뛰듯 반가운 비였다. 때맞춰 며칠간 내린 봄비는 청랑한 봄바람까지 데려왔다. 꽃샘바람에서 꽃바람으로, 때로는 명지바람이나 산들바람으로 풍후(風候)를 조절한다.

"잔잔한 봄비 밤새 내린 날/ 산녘은 일제히 연초록으로 차오르다/ 아련한 사연들이 빛화살처럼/ 꿈꾸듯 무시로 영사(映寫)되다/ 흔들리는 세파 속에/ 늘 한발 먼저 와서 기다리는 세월/ 절로 터지는 탄성/ 하오 햇살에 비끼는 연초록 군락/ 콱콱 숨이 막힐 지경이다/ 아아, 이 황홀!/ 그 그리던 별세상이 시방 바로 여기로고." 나의 졸음 자유시 ‘봄 내음의 색감’과 ‘하오의 이 황홀한 신록’ 두 편에서 일부 구절을 뽑아 짜깁기했다. 

연초록 신록을 몰고 온 올 봄비는 바로 숨 막힐 지경의 황홀한 별세상을 상연한다. 근년 70대 후반 연세에 이른 박인수 선생이 생활고와 각종 질환에 시달린다는 말이 있다. 그의 외로운 ‘봄비’가 카타르시스가 돼 열락의 봄비로 바뀌길 기원한다.

이번 봄비는 또한 강한 모성성의 상징이다. 특히 밤 사이 은은히 내리는 밤비는 자궁 속에서 듣던 모성의 심박동이다. 그윽한 사랑자국이다. 이달에는 24절기 청명과 곡우가 보름 간격으로 다 들어 있다. 드맑은 날씨에 비가 자주 내리고 만물이 왕성하게 자라나는 때다. 부지깽이 거꾸로 꽂아도 살 만큼 생명력이 넘치는 데는 봄비의 역할이 크다. 봄비의 풍요로운 자양분이 온 대지를 촉촉이 적셔 준 덕분이다. 텃밭에 파종한 채소, 막 다홍빛 꽃송이를 떨궈 버린 동백나무, 그들의 새순들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참 오묘한 자연의 섭리다. 

안타까운 일은 내가 사는 이웃 동네에 52세 남성의 고독사가 생긴 점이다. 5개월째 관리비나 카드 연체 안내문 따위 50여 통의 우편물이 넘쳤다고 보도됐다. 기초생활수급자나 홀몸노인이 아닌 사각지대층의 고립된 절망사 같아 딱하기 그지없다. 이들에게도 봄비의 모성성이 스며들, 보다 세심한 대책을 정부 당국에 촉구한다. 포기하지 않고 살고자 하는 생존의지를 북돋워 주는 봄비의 생명력이 새삼 돋보이는 까닭이다.

올 봄비는 이저승의 대소사를 감싸 안는 너그러움이 들어있다. 19년 만에 온 음력 윤이월이 함께하는 달이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문인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는 윤달은 결혼, 수의 마련 등 길흉 만사에 거리낌 없는 달이라고 했다. 흔히 손이 없어 미뤄 뒀던 집안 대소사를 처리하기도 한다. 나는 얼마 전 충남 논산시 강경읍에 계시는 96세 처고모님을 찾아뵀다. 초등학생 때부터 평생 서예를 하신, 한글 궁서체의 대가라 할 만하다. 환희와 여망의 올 봄비 속에서 모든 분들의 숙원이 해결되기를 바라 본다. 단시조로 축원한다.

春雨夜(춘우야) ; 봄비 오는 밤 

우주의 복음인가
두런두런 민담인가
 
인생사 어지러움
다 어디로 보내지고
 
잊혀진
적막을 깨워
우리 곁에 나툰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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