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 ㈜KG 패스원 교수
김준기 ㈜KG 패스원 교수

인생의 가치를 능력과 기능 관점에서 판단하고, 삶의 의미를 쓸모와 유용 측면에서 재단하는 태도는 자칫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인권을 줄기차게 주장하며 획일적 평등을 가열차게 지지해 온 이들에게 인간에 대한 지나친 모욕이며 노골적인 폄하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혜강 최한기는 실학의 중심에 있었던 정약용과 달리 무명에 가까웠던 조선 후기 비주류 실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조선의 전통과 문화 실체를 치레가 아닌 실제에 입각해 가늠하고, 당시 섭렵 가능한 동서 자원의 취사를 통해 새로운 학문적 전통을 추구했던 그는 특히 구성원들의 능력과 자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개개인의 기능과 역할의 과불급을 조율하는 것이 정치의 요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시대와 무관하게 여전히 우리 정치에 유효하다. 개인적 능력을 배제하고 사회적 여건을 외면한 채 보편적 복지를 천양하고 무차별 혜택을 설파하는 것은 공허하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상은 법적 규제와 힘의 강제를 통하거나 이성과 사회적 제도를 통해 균질화된 사회를 만들고, 결과적 평등을 보장하며 사회적 질서를 도모하고자 했던 법가나 순자의 학설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혜강은 통제나 억압, 일방적인 시혜가 아닌 철저한 이익에 기반한 개발과 자유를 통해서만 국가의 번영과 개인의 행복이 가능하다고 봤다. 실제로 이익 추구에 대한 욕망이 정직하고 이익 획득 과정이 공정하기만 하면 이익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분쟁과 갈등은 치유 가능하며, 집단적 분열과 투쟁은 봉합 가능하다. 

농본주의 왕조에서 박제가는 경제적 이익을 적극 지향하는 상업주의자였다. 그는 수요가 공급을 어떤 방식으로 증대시키는지, 또 공급이 어떻게 수요를 확장시키고 국부를 늘리며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지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송시열에서 이어져 온 노론의 강고한 성리학적 이념에 경도된 조선은 이러한 새로운 논리와 주장을 거부하고 결국 쇠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재화는 개개인의 노력에 따라 결정되고 각자 기여도에 따라 배분돼야 한다. 돈은 정상적인 거래와 지체 없는 순환만 담보된다면 투명하고 건강한 사회를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조선조 이래로 우리 사회는 집요하게 재리를 쫓고 적극적으로 부귀를 원하며, 노골적으로 명성을 선호하고 거칠게 권력을 추구하면서도 겉으로는 이것들을 외면하는 척하거나 도외시하는 체하며 자신을 기만하고 남을 속여 왔다. 이 같은 이중성은 조선조 이래로 대물림돼 온 유구한 인습의 산물이고 공고화된 유산의 결과물이다. 특히 조선조 중기 이후 지식인들의 이 같은 자기분열적 행태는 성리학을 수단으로 과거(科擧)를 통해 현실 정치에 뛰어들고자 하면서 더욱 증폭되고 왜곡되는 현상을 초래했다.

학문과 출세, 도학과 권력 사이에서 딜레마에 직면했던 사대부들은 절충과 타협을 통해 산림으로 퇴거하거나 벼슬길에 나섰다. 하지만 정치에 뛰어든 그들도 ‘절대적 순수’를 명분으로 내건 정치적 슬로건이 무색하게 세상을 운영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무능하기 짝이 없었으며, 정치적 파당과 그들만의 권력 쟁탈에 몰두했다. 산림으로 물러난 사림들 또한 체면과 권위를 앞세워 무위도식을 일삼으며 민생과 사무를 외면했다.

조선은 이(利)와 도덕이 결별하면서 패망의 비극을 싹틔웠으며, 이익과 실무를 폄하하고 주자의 명분과 가르침에 경도돼 결국 몰락했다. 

도덕에 집착해 공정한 경쟁을 제한하고 합법적인 이윤 추구를 배제한 상태에서의 완전한 평등은 결국 가난한 평등을 초래할 뿐이다. 평등을 내세워 대기업을 악의 무리로 규정하고 재벌을 사악한 집단으로 매도하며 부자를 죽이자는 슬로건을 앞세워 공정한 경쟁을 거부하고 합리적 실용을 배제하며 합법적 이익을 부인하는 정치로는 그들 일부의 배만 불릴 뿐, 우리 삶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는다. 

새삼 19세기 실학의 일단을 소환한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무능한 안방샌님 정치와 위선적인 이념투사(鬪士)정치의 맞섬이 보이는 작금의 퇴행적 사태에 기인한다. 물론 실용을 미국의 청바지 문화쯤으로 여기는 듯한 인상을 지우기도 어렵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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