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이강동

민속적이며 향토적 색채가 있는 탈춤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 됐다. 우리의 전통음악과 무용은 제천의례로부터 시작, 제천의례에 공연 되는 정악과 무용이 무속·궁중의례·군악·판소리·민요·탈춤 들로 이어져왔다. 

단군 문화를 이어온 동이인들의 음악과 무용은 맛있다고 했다. 음악과 무용이 즐겁고 유쾌하다고 했다. 무용이 부드럽고 왕성하면서 음탕한 면도 있다고 했다. 동이인들의 음악과 무용은 무속의 음악과 무용이 같다고도 했다. 무속에서 사용하는 용구들이 동이의 악사 그림과 같다고 했다.

중국 대륙 중원지대에서 만주지역까지 생활 근거지였던 동이인들의 문화가 대립 세력이었던 중국 고대 한족들에게 전파가 될 정도로 동이인들의 문화권에 속해있었던 중국이다. 중국의 제천의례에 동이인들의 음악과 무용이 공연됐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음악과 무용도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로 전파됐다. 고구려 악대를 설비하고 상설 공연한다. 고구려의 음악과 무용을 중국인들이 즐겼던 것이다. 

고구려 음악과 무용은 격식이 없었다. 악공들은 색동옷을 입고 마음에서 솟아 나오는 즐거움을 몸짓으로 마음껏 표현하며 공연했다. 고구려 각 지역 마을에서도 남녀들이 모여 음악과 무용을 즐겼다. 주례·예기·북사· 효경·위지·삼국지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한다.

동이는 정월, 마한 5월·10월, 부여 5월, 고구려는 10월, 신라 10월, 백제는 정월과 10월에 제천의례를 거행하면서 민중들과 함께 음악과 무용을 즐겼다. 우리의 정악과 무용은 국가적 의례인 나례·산대·처용의 풍속에서도 이어져왔다. 모두 역귀를 쫓아내는 국가적 행사다. 탈춤의 시작이었다. 황금 가면을 쓰고, 백제에서는 삼베탈도 있었다. 우물 제례에도 삼베탈을 쓰고 했는데 사각의 삼베탈이었다. 고려의 민중들은 나례를 산대라고도 불렀다. 궁궐에서는 나례라 부르고 음악과 무용이 있는 탈을 쓰고 즐기는 민중들의 놀이 문화이기도 했다. 산대 놀이에 사용되는 탈은 모두 22개인데 노승들이 쓰는 탈은 백색·흑색·자색으로 눈과 눈썹은 황금색으로 분장해 사용한다.

중들의 난행과 양반들의 전횡을 풍자하는 내용도 있는 탈춤놀이다. 산대 놀이는 중국 사신들의 환영 연회로 궁궐에서 공연했다. 고려의 만석 승무에는 호랑이와 사자 탈을 사용하는데 나례 의식·임금의 환궁·궁궐의 낙성식에도 공연됐다. 나례 의식에 공연되는 음악과 무용은 고려와 조선에서 군악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동이인들에게 이어져 오는 국가적 행사 였던 나례 의식은 봄·가을·연말에 거행했다. 임금이 직접 참여해 동서남북으로 나라의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고 봄을 맞이 하는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황금가면을 쓰고 꽹과리·징·북 등을 두드리며 행진하면서 역귀를 쫓아내는 모습을 하면서 거행했다.

처용도 역귀를 쫓아 낸다는 것이 민중들에게 알려지면서 처용그림을 문에 붙이는 풍속이 신라에서 있었다. 처용무로 나례의식을 거행한 신라에 처용이 알려진 것은 신라 헌강 임금 때였다. 

헌강 임금이 개운포에 다녀오는 대낮에 암흑 세상이 돼 임금이 놀라자 신하는 동해 용왕의 장난이라고 했다. 절을 하나 건립하는 게 좋다고 건의하자 임금이 건립하라는 지시를 했고 곧바로 쾌청해지며 용왕과 아들 7명이 임금 앞에 나타나 감사의 뜻으로 춤을 춘것이 처용무였다.

역귀가 처용의 그림이 붙여있는 집에는 침입하지 않는다는 맹서를 했다고 하여 민중들이 처용그림을 붙이는 풍속이 생겼다. 처용무도 황금가면을 쓰고했다. 

중국의 나례 의식에도 황금가면을 썼다. 공자도 사당의 조상 신들도 무서워 할까봐 보위에 나선다고 했듯이 전쟁 보다도 무서워 했던 것이 역귀다.

중국에서 산붕·산차·산등·산루라 불리는 놀이는 우리의 산대 놀이와 같은 의례와 놀이의 풍속으로 보고있다. 복숭아 나무·경나무·쑥·울뢰 등으로 흉악한 역귀를 쫓아 내는 행사도 겸했다고 한다. 몽고와 서장 지역에서도 가면 탈을 쓰고 춤추는 탈춤이 있다는 자료가 있다. 나례·산대·처용이 탈춤의 연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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