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 TV 프로그램에서 매일같이 누군가의 집으로 전화를 거는 남성의 이야기를 방영한 적이 있었다. 몇 달째 이어지는 전화. 그러나 발신인은 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신인의 집엔 이제 막 태어나 꼬물거리는 작은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작고 귀한 생명이 사는 집은 매일 밤 헤어나지 못하는 전화 지옥에 빠져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강박적으로 울려 대는 전화벨 소리는 공포에 가까웠다. 도대체 누가,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악의적인 전화를 거는 것일까? 

결국 발신자 추적에 나섰고, 장소를 이동하며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철저함을 보인 이는 결국 CCTV에 덜미가 잡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발신인은 수신자 집의 가장과 고교 동창이었다. 못된 전화를 일삼던 남성은 근 20여 년 전에 발생한 학교폭력의 피해자로, 당시 겪었던 억울함과 분한 감정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사과를 받고 싶은 심정에 수화기를 들었지만, 맺히고 쌓인 말을 단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끊고 다시 걸기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학폭의 피해자이자 현 시점에선 전화 폭탄의 가해자가 된 그 남성이 원하는 건 진심 어린 사과였다.

2011년 개봉한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은 현대 계급사회의 권력과 그 폭력성을 학교를 무대로 고발한 작품이다. 중학교 동창인 경민과 종석은 15년 만에 다시 만나 기억 저편에 묻어 둔 과거를 회상한다. 동급생들 사이에서도 가정 형편, 학업 수준, 힘센 선배의 뒷배로 철저히 나뉜 계급사회인 학교. 성인노래방 집 아들 경민과 가난한 집안의 종석은 아무런 줄도, 빽도 없는 가장 낮은 계급이었다. 경민은 자신처럼 부조리에도 아무 말 못하고 폭력에 순응하는 약자들의 무리를 돼지로 봤다. 사육당하고 지배당하는 비극적인 운명의 돼지는 잡아먹힐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듯이, 피해자들 또한 폭력을 감내하고 살아가는 게 당연하다는 식의 자조적인 표현이었다. 

아무 희망 없는 이들 앞에 김철의 등장은 한 줄기 빛이었다. 한 주먹 하는 철이는 학폭 중심에 선 반장 무리에게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았다. 밟을수록 더 세게 반격했다. 드디어 지옥 같은 세상을 끝내 줄 돼지의 왕이 등장한 순간이었다. 약육강식의 계급사회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더욱 악해지는 길뿐이라고 믿는 철이는 약한 길고양이를 학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힘과 폭력성을 과시했고, 종석과 경민도 그 논리 속에 매몰돼 전복을 꿈꿨다. 하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번 잡은 권력은 그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더 세게 기강을 잡았고, 돼지들의 우상이었던 철이도 그저 평범한 아이였음이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작품 ‘돼지의 왕’은 계급사회의 축소판인 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통해 끔찍한 결말로 나아간다. 그리고 폭력의 끝은 트라우마와 연쇄작용에 있음을 말한다. 치유받지 못한 감정은 그대로 남아 피해자의 삶을 피폐하게 하며, 더 나아가 당시 경험은 오히려 학습돼 은연중에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굴레를 형성한다. 작품은 계급구조가 낳은 폭력의 근원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우리는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와 함께 세상의 모든 타인도 자기 자신만큼이나 소중하고 유일한 존재임을 잊지 않고 존중한다면 차갑고 숨 막히는 폭력의 순환에서 멀어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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