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친구를 적게 사귀었다. 새로운 반을 배정받아 1년을 부대끼며 살아도 기껏해야 2명, 많아 봐야 3명 정도를 겨우 사귀었다.

낯을 가리는 내향형 성격 탓이라고 생각하며 큰 뜻을 두지 않았으나, 어느 날 친구 고민을 들어주다가 인간관계가 이상함을 느꼈다.

친구는, 자신의 또 다른 친구가 어느 순간 불편해졌다고, 그 애의 특정 행동이 거슬린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도 마땅한 조언을 해 줄 방법이 없었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과 친구가 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모습이 느껴지면 그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결벽에 가깝게 사람을 가려 왔다. 불편한 모습이 느껴지는 사람에게는 물러나지 않을 선을 긋고 대했다. 가까운 사람이 불편한 모습을 보인다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곧바로 거리를 뒀다. 그렇게 멀어진 친구가 꽤 많았다.

‘친구’라고 이름 붙일 만한 관계라면 그 사람 모든 면을 이해하고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과 행동이 모두 무의식으로 이뤄졌기에 오랫동안 이런 사고방식을 모른 채 지내왔다.

교복을 벗은 뒤 어른이라는 사실이 익숙해졌을 때, 그러니까 조금 더 많은 사람을 만나 본 뒤에야 이상한 강박을 겨우 알아차렸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른 도덕관념을 가진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그 사람과 어울리는 일이 즐거웠다.

나랑 전혀 맞지 않는 불편한 사람에게서 존경스러운 모습을 발견한 적도 있었다.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멋있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불쾌한 사람이었다.

모든 면이 아름다운 사람은 없었다. ‘깨달았다’는 표현이 어색할 정도로 너무나 당연하고 명백했다. 그제야 겨우 우물 안에서 한 발짝 벗어난 기분이었다.

모든 모습이 만족스러운 인간은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다른 사람을 대하는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다른 사람의 모든 면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났기 때문이다. 친구에게서 좋은 점만 바라봐도 충분했다. 좋은 가족, 좋은 애인까지는 몰라도 되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스스로에게도 적용 가능하다. 가까운 사람들의 모든 면을 이해해야 할 듯싶은 마음과 똑같이, 나의 모든 모습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볼 때면 고마움 뒤로 막연한 불안이 생겨났다. 본 모습을 알면 실망은 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건강하지 못한 사고방식 탓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해 줄 사람은 결국 없다고 언제나 우울해하곤 했다. 불가능한 이상에 매달렸기 때문에 항상 비관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는 인간의 모든 면을 보여 주고 심지어 이해까지 받기는 불가능했다. 나조차도 내 모든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우니 당연했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모든 면을 사랑하고 사랑받지 못한다면 나 또한 친구들에겐 좋은 친구로서 모습만을, 가족들에겐 좋은 가족으로서 모습만을 보여 주면 될 뿐이다.

사람들의 또 다른 모습을 알아내려 전전긍긍하거나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나쁜 모습을 굳이 내세울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모습을 사랑하거나 사랑받지는 못한다.

이 이야기는 다소 염세주의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비관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예사로운 현실 인식에 가깝다. 누구나 자신만의 역사가 있는 입체 인간이다. 따라서 어느 한 모습이라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한 모습이라도 누군가를 좋아할 건더기가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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