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 누가 봐도 일본인 이름이다. 1903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23세라는 너무 이른 나이에 옥중에서 사망한 이 사람은 2018년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유공자이기도 하다. 한국 이름 박문자인 가네코 후미코의 묘는 경상북도 문경시에 있다. 문경은 바로 후미코의 남편인 박열 의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영화 ‘박열’은 무정부주의자인 박열과 후미코가 속한 ‘불령사’라는 조직의 청년들이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반일운동을 펼친 3년여의 시간을 담았다. 영화 내용 상당 부분이 고증에 입각해 제작됐다는 오프닝 자막은 일제의 핍박 속에서 힘겹게 투쟁한 역사를 진지하고도 무거운 분위기로 그려 냈을 거라 추측하게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예상을 뛰어넘는다. 영화 ‘박열’은 청춘의 에너지가 살아 숨 쉬는 작품으로 기존 독립운동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경쾌함과 유쾌함으로 가득하다.

1923년 도쿄의 거리에서 한 남성이 인력거를 끈다. 이 사람이 바로 박열이다. 제도화된 권력에 반대하며 세계 해체를 통해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는 무정부주의자인 그는 날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다. 그런 그에게 가네코 후미코가 찾아와 동거를 제안한다. 후미코는 ‘조선청년’이란 동인지에 실린 박열의 시의 통쾌한 풍자성과 저항정신을 보고 호감을 느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아나키스트 활동에 있어서 그 어떤 비밀도 없으며, 동등한 위치에서 전개해 나가겠음을 서약하며 시작된다.

그러던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규모 7.3의 지진이 6~7분간 이어지는 관동대지진이 발생한다. 무시무시한 강진으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은 수많은 일본인들의 내부에서 상실감을 넘어선 폭동의 기운마저 감돌자 그 분노의 화살을 조선인에게 돌릴 목적으로 일본 내무성 주도 아래 유언비어가 퍼진다. 내용인즉슨 조선인들이 재난지역 가옥에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탄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분노한 일본인에게 무참히 살해된 조선인 수는 무려 6천여 명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는 그 모든 혼란의 주범을 독립운동가에게 돌리려 했고, 눈엣가시인 박열과 후미코는 일본 황태자 암살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됐다. 확실한 물증도 없었지만 박열과 후미코는 덫에 빠졌음을 직시하고 더 큰 그림을 그리며 역모를 인정했다. 그리고 이들은 재판장에 설 때 조선 예복을 입고 일본의 강도행위를 규탄하는 선언서 낭독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이 될 재판 전, 두 사람은 옥중 결혼식을 올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 대신 여유와 낭만이 숨 쉬는 포즈의 이 사진(영화 포스터로 재현)은 훗날 일본 내각과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2017년 개봉한 영화 ‘박열’은 일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의 실화를 담아낸 전기영화다. 당시 비극적인 시대상을 보여 주지만 박열과 후미코의 당당한 기백이 통쾌한 전율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단 한 사람의 영웅만을 추앙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의지가 돼 준다. 후미코 없는 박열도, 박열 없는 후미코도 없듯이 두 사람과 뜻을 함께한 많은 이들의 힘과 응원이 모여 마침내 변화의 새벽을 맞이함을 영화는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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