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지난 1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대법관 박경미)는 오랫동안 유지돼 온 종전의 판례를 변경하는 중요한 판결을 내렸다. 이날 대법원은 현대자동차가 노조 동의 없이 월차휴가를 폐지하고 연차휴가 일수를 제한하는 등 취업규칙을 불리하게 변경한 건 부당하다며 현대차 간부사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를 적용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대법원 2023. 5. 11. 선고 2017다35588, 35595(병합) 전원합의체 판결].

대법원은 판결 취지를 담은 보도자료에서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 없이 취업규칙을 기존보다 불리하게 변경했더라도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그 적용을 인정한 종래 대법원 판례를 모두 변경했다"고 밝혔다. 이어 "근로조건의 유연한 조정은 사용자에 의한 일방적 취업규칙 변경을 승인함으로써가 아니라, 근로자 동의를 구하는 사용자의 설득과 노력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취업규칙이란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근로자가 준수해야 할 규율과 근로조건에 관한 세칙을 정한 규칙을 말하며, 사용자가 작성 주체다. 근로기준법 제94조 제1항은 "사용자는 취업규칙의 작성 또는 변경에 관하여 해당 사업 또는 사업장에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에는 그 노동조합,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에는 근로자의 과반수 의견을 들어야 한다. 다만,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는 경우에는 그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즉,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는 경우에는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과반수 노조의 동의, 과반수 노조가 없는 경우에는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종전의 대법원 판례는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이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는 경우에는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를 얻지 않았더라고 ‘유효’하다고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었는데, 이번에 "사회통념상 합리성 유무에 상관없이 반드시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취지로 종전 판례를 변경했다.

사실 종전의 판례 태도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오래전부터 많은 비판이 제기됐다. 주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근로기준법 제94조 제1항 단서의 법문에서 전혀 규정하지 않은 ‘사회통념상 합리성’이란 개념을 도입해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의 유효 요건으로 인정한 것은 법 해석 기관인 법원이 마치 입법기관인 듯 행세하는 처사이므로 부당하며, 이는 자의적인 ‘법형성적 판결’이라는 것이다. 둘째, ‘사회통념상 합리성’이란 개념이 매우 모호해서 법적 불안정성을 야기하고, 법 적용의 명확성을 해쳐 갈등과 분쟁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확산할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이러한 비판들을 이번에 대법원이 받아들여 판례를 변경함에 따라 앞으로 임금체계와 노동시간 개편 등 노동개혁 전반에서 ‘노사 합의’와 ‘근로자 동의’의 중요성이 한층 커지리라 예견되는데, 이는 헌법과 노동법의 기본 원리인 ‘노사대등주의’와 ‘노사자치주의’를 존중한 것이므로 크게 환영할 만하다. 즉, 근로기준법에 강행규정으로 정한 ‘집단적 동의’를 ‘사회통념상 합리성’으로 대체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의 유효 요건을 법문에 합당하게 정립한 판결로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윤석열 정부는 노사관계의 불법·부당한 관행 개선을 통한 ‘노사법치주의’ 확립을 추진하겠다고 천명하면서 노조에 대해 강경한 대립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고용관계는 본질적으로 사적 계약관계에서 비롯하기에 무엇보다도 ‘계약당사자 간 의사의 합치’가 중요하다. 노사자치주의를 존중하지 않고 정부의 일방적 원칙을 강요하는 노동개혁은 성공하기 힘들다. 과거에도 정부의 일방적 노동개혁 추진은 사회 갈등만 촉발하고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정부는 대법원 판례 변경의 취지를 십분 감안해 지금부터라도 ‘노사자치주의’를 존중하는 틀 안에서 노동개혁 이슈들을 논의하고 점검해야 한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