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의 속성상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는 외로워 둘이랍니다. 둘은 알뜰히 사랑했더랍니다. 영원토록 행복을 수놓으며 사랑의 초원에서 살았답니다"라는 어느 시인의 시 구절이 오래도록 제 기억 속에서 꿈틀거립니다.

그러나 짝이 있다고 해서 외로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고독이 나를 위로한다」(마리엘라 자르토리우스)에서 저자는 "사람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외톨이로 여겨지는 것’이다. 당신은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다. 루소는 ‘사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덜 힘들다’고 말했다. 외로움은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 엄습한다"고 말합니다.

저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단어처럼 외로워서 누군가와 짝이 됐다고 해도 여전히 ‘외로움’은 수시로 얼굴을 드러내곤 하니까요. 그럴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고, 그래서 그걸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며 변화를 추구하곤 합니다.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외로움’은 자신의 성장을 위한 아프지만 소중한 감정이 될 수 있습니다. 성장에는 아픔의 과정이 항상 따르니까요.

숨 막힐 정도로 바쁜 현대인들의 삶은 외로워할 틈이 없는 듯 보입니다. 깨어나 다시 잠이 들 때까지 늘 바쁜 일정들이 놓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어제와 똑같은 ‘나’만이 존재합니다. 다만, 흰 머리와 주름살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 줄 뿐입니다. 외로움을 느껴 볼 시간이 없다는 말은 곧 내가 변화하고 성장할 기회를 잃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외로움은 내가 혼자라는 느낌이 강할 때 찾아옵니다. 이 말은, 내가 상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외로움을 느낀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외로움은 상대방과 내가 단절됐음을 뜻합니다. 이때 단절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에게서 찾으면 희망이 생깁니다. 내가 변화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탓에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아닌 상대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로 일관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외로움의 경험이 나를 성장과 성숙으로 이어지게 할까요? ‘외로움의 시간’을 ‘고독의 시간’으로 바꾸면 됩니다. 외로움은 상대가 단절의 신호를 보내올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이므로 나는 피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단절 여부를 내가 결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독’은 다행스럽게도 ‘나’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고독의 시간’을 통해 모든 창조와 성공이 이뤄집니다. 「불타재탄」(오오까와 류우호우)에서 저자는 외로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긴 여행을 혼자 견딜 각오를 해라. 인생의 승리 열쇠는 고독을 견디어 내는 데 있다. 왜냐하면 참된 성공 전에는 반드시 고독의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고독 후에 반드시 즐거움이 온다. 그러니 그 고독을 어떻게 끝까지 살리느냐가 문제다. 사실 고독한 게 아니다. 영혼을 단련하는 중이다. 지금 빛이 나오려고 한다. 고독을 두려워 말라. 고독 속에서만 영혼이 자란다. 화려함만을 구사하지 말라. 고독을 이김으로써 참된 용기의 소유자로 바뀐다."

이 글을 읽으면서 작은 방에 앉아 기도를 올리는 성직자의 고독이 떠올랐고, 암을 규명하겠다며 실험실에서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하는 과학자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어느 날 그들의 고독은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큰 위안이, 생사를 넘나드는 환자들에게는 새 생명을 선사하는 희망이 될 겁니다. 세상의 모든 기적은 고독이 주는 선물입니다.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꾸는 것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결정만 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그 결과는 수많은 이들의 희망으로 이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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