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수찬 인천중구문화재단 영종역사관장
견수찬 인천중구문화재단 영종역사관장

인천광역시 중구 중산동 ‘영종진 역사공원’ 일대에 일부 흔적만 남은 영종진(永宗鎭)은 경기도 남양에 있던 군진을 1653년(효종4)에 옮겨 온 것이다. 영종진이 옮겨 온 후 ‘자연도(紫燕島)’였던 섬의 명칭도 점차 진(鎭)의 이름을 따라 ‘영종도’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조선초 남양부에 영종진이 처음 설치된 것은 태종∼세종 연간의 일로, 고려말부터 극심해진 왜구의 노략질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후 유사시 왕실의 피난처인 강화도의 방비와 인천 월미도와 자연도를 거쳐 강화에 도달하는 왕실의 피난로를 추가 확보하는 문제가 시급해짐에 따라 남양에 있던 영종진을 인천도호부의 자연도로 옮겨 왔다. 이는 청나라가 갑곶을 거치는 길만 알고 자연도를 경유하는 새 루트를 모르는 것에 왕과 신하가 함께 안도하고 기뻐하는 장면이 「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당시 조정의 중요 관심사였다. 곧이어 월미도에 행궁(行宮)이 설치되는 것도 유사시 왕실이 인천 앞바다의 수로를 사용하기 위한 대비책의 하나였다. 

영종진은 숙종대에 군진의 격을 방어영으로 높이고 둔전을 설치하는 등 대대적으로 기능을 보강했는데, 이것은 숙종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강화의 국방시설 강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왕실의 피난처로 강화가 중시될수록 강화수로 입구와 제2의 피난로를 지키는 영종진의 위상도 함께 높아졌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청나라와 관계가 개선되고 이양선 출몰이 잦아짐에 따라 영종진의 역할도 서양 세력의 강화해협, 한강하류 접근을 봉쇄하는 것으로 점차 바뀌어 갔다. 고종 즉위 후에는 이양선 출몰과 서양 세력과의 충돌이 더욱 빈번해지면서 프랑스 함대(1866), 옵페르트 함대(1868)의 공격을 잇따라 막아내는 등 군사적 요충지로서 영종진의 역할이 더욱 부각됐다. 그러나 1875년(고종12) 8월 21일 일본군함 운요오호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함락돼 관아와 민가가 모두 소실되고 폐허로 변했다. 

이후 함포사격에서 방어가 용이한 백운산 자락에 영종진을 재건했지만, 곧이어 개항이 단행되고 군사적 필요성이 점차 사라져 1895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고 말았다.

오늘날 영종진의 과거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유적은 당시 성곽 기저부로 추정되는 일부 석축뿐이다. 운요오호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자리에 민가가 들어서고 경작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관아와 성곽 흔적이 대부분 멸실됐기 때문이다. 

영종진 터에 대해서는 1990년대 이후 몇 차례 문화재 지표조사가 있었고, 2000년대 후반에는 하늘도시 개발사업과 관련해 발굴조사도 진행됐다. 그러나 별다른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그 터에 공원과 영종역사관이 들어섰고, 구읍나루에 인접한 구역은 상업용지로 개발됐다. 현재 영종진 역사공원 일대에는 수령 300년의 느티나무와 무너진 성벽 말고도 전몰영령 추모비, 재현된 성벽과 태평루, 대포, 영종역사관이 들어서 치열한 역사의 현장이었던 영종진의 옛 모습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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