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발발 당시 수도를 방위하려고 투입한 육군사관생도들은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불과 입교 20여 일밖에 되지 않은 생도들은 기본 군사교육도 없이 악화일로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무섭고 두렵지만 국민을 지키려고 후퇴 명령도 무시하고 남양주시 불암산 자락에 근거지를 두고 활약한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가 존경스러운 까닭이다. 서울 수복을 불과 1주일 남기고 북으로 끌려가는 국민을 구출하면서 장렬히 산화해 안타까움을 더한다. 

주민들의 기억 속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의 장엄했던 기록을 들여다본다.

유격대의 활약 뒤에는 불암사와 석천암 주지스님들의 물심양면 지원이 있었다. 사진은 불암사 전경.
유격대의 활약 뒤에는 불암사와 석천암 주지스님들의 물심양면 지원이 있었다. 사진은 불암사 전경.

# 경험·장비·정보조차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투입한 ‘생도대대’

한국전 발발 직후 전투에 나선 육군사관생도는 임관을 3주 앞둔 1기생 262명과 입교한 지 20여 일밖에 되지 않은 2기 334명이었다.

군사 경험은 고사하고 소총사격도 하지 않은 상태인데다, 지급한 무기와 장비마저 볼품없었다. 생도들은 M1 소총과 기관총 같은 경·보병 화기로 무장했고, 실탄은 M1 소총의 경우 한 사람 앞에 56발 정도를 지급했다.

포는 81㎜ 박격포 3문이 전부였고, 중화기 중대에 지급한 박격포 포탄은 고작 50여 발에 불과했다. 전방의 적은 물론 인접 부대 상황에 대한 정보도 전무한 상태였다.

정신력으로 이길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생도들은 빠르게 출동했다. 6월 25일 오후 3시 편성을 마친 생도대대는 오후 8시 부평리에 도착했다. 포천에서 서울 방향으로 내려오는 326번 도로와 현리 방면에서 남쪽으로 연결한 391번 도로가 교차하는 장소다. 생도대대는 주변에서 지형을 감시하기에 가장 높은 고지인 도로 372고지에 배치했고, 도로 건너편 동쪽 330고지는 함께 작전을 펼칠 경찰대대를 배치했다.

하지만 북한군 제3사단 9연대 예하 1개 대대 규모 병력이 경찰대대를 공격하면서 10여 분 만에 탄환이 바닥나면서 모두 철수했고, 생도대대 역시 탄약 부족으로 돌파당했다.

26일 밤 북한군이 의정부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육군본부는 ‘창동 방어선’ 구축에 나섰고, 이때 생도대대는 불암산과 육사를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하지만 창동 방어선도 무너지면서 후퇴 명령이 내려온다.

남양주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구국충혼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격렬한 전투 흔적이 역력한 육사생도의 철모가 충혼비를 찾은 방문객들을 반겼다.
남양주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구국충혼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격렬한 전투 흔적이 역력한 육사생도의 철모가 충혼비를 찾은 방문객들을 반겼다.

# 패배보다 전세 역전을 노린 호랑이 유격대

후퇴 명령에도 적진에 남아 싸우기를 결심한 생도들이 불암산 일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유격전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부대가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다.

1기 생도 10명과 2기 생도 3명이 국군 7사단 19연대 장병 7명을 규합해 조직했다. 불암산 일대 동굴을 유격 기지로 삼아 윤용문 불암사 주지스님과 김한구 석천암 주지스님 지원으로 1960년 6월 29일부터 서울 수복 1주일 전인 9월 21일까지 80여 일 동안 북한군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 기지를 타격하는 작전을 펼쳤다.

20명으로 구성한 유격대는 만장일치로 1기 김동원 생도를 유격대장으로 선출했다. 이후 제1조 조장 조영달 생도, 제2조 조장 박인기 생도, 제3조 조장 김만석 중사를 임명했다.

정보책으로 홍명집 생도를 임명해 불암사 주지스님과 접촉을 전담했는데, 주지스님은 주변 마을의 믿을 만한 신도들한테 정보를 수집해 유격대에 전달했다.

문제는 무기와 장비였다. 생도들은 소총과 수류탄만 들고 입산했지만, 다행히 7사단 병력을 배치했던 진지에서 기관총 3정, 수류탄 50여 발, 탄약 3천여 발을 추가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같은 생도들의 유격 활동은 불암사 주지스님과 인근 주민의 지원 덕분에 가능했다. 유격대를 이끌던 김동원 생도는 불교 신자로, 평소 불암사를 자주 방문해 주지스님과 친분이 있는 상태였다.

6월 28일 태릉 전투가 한창이던 때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지만, 후방으로 후퇴하면 전세를 역전시키지 못한다고 판단해 자신과 뜻을 같이한 동기·후배들과 주지스님을 찾아가 의사를 피력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석천암 주지스님은 유격대가 숨어 지낼 만한 동굴 몇 곳을 안내했고, 은밀하게 끼니를 제공하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조선경비사관생도.
조선경비사관생도.

# 호랑이 유격대 반격

유격대는 약 3개월간 활동하면서 4차례에 걸쳐 공격 작전을 펼쳤다. 첫 번째 공격은 7월 11일 새벽 퇴계원 북한군 보급 물자 적치장 기습이었다. 북한군이 전선 전방으로 가능하면 빨리 보급품을 보내려고 퇴계원역 주변 공간에 많은 물자를 쌓아 둔 상황을 노린 작전이었다. 

7월 5일과 8일 야간에 생도 2명이 민간인 복장으로 사전 정찰을 해 규모와 경계 병력을 확인했다. 이후 주력조와 지원조로 나눠 경계가 소홀한 적 보급기지를 급습해 보급품을 불태우고 30여 명을 사살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1기 생도 김봉교·박인기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2기 생도 1명이 희생하고, 한호준 생도가 부상을 입었다. 

7월 31일 두 번째 공격 대상은 창동국민학교와 인근 북한군 수송부대, 보안소였다. 유격대원 6명이 수류탄과 화염병을 갖고 적의 숙영지와 보급차를 습격했지만 작전 제안자인 김만석 중사가 사망하고 말았다.

가장 규모가 컸던 세 번째 공격은 공교롭게도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였다. 육사는 적이 의용군 훈련소로 사용 중이었다. 유격대장은 무고하게 끌려온 학생들을 탈출시키겠다고 마음먹고 워낙 적의 규모가 커 세밀한 준비에 착수했다.

세세한 공격·철수 방향을 정하고 공격 직후 불암산에 대한 적 수색에 대비해 수락산 반공 인사 은거지로 근거지를 옮겼다. 드디어 8월 15일 야간 유격대원 15명이 교도대와 생도대 막사에 수류탄과 화염병을 던지며 공격해 북한군 50여 명을 사살했다. 불행하게도 이 과정에서 유격대장 김동원과 생도 6명이 희생했다. 

공격을 마치고 4주가량 수락산 반공 인사들의 환대 속에서 새롭게 조직을 정비하고 조영달 생도를 새로운 유격대장으로 선출했다.

총탄에 맞은 생도의 철모.
총탄에 맞은 생도의 철모.

9월 15일 불암산 기지로 복귀하자 정보원이 육사 습격 이후 적이 한꺼번에 불암산을 수색했고, 윤용문 주지를 의심해 연행했다고 전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UN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서울 외곽에도 폭격이 간간이 가해지는 중이었다. 

그러던 9월 21일 정보원은 북한군이 유엔군의 서울 공격에 대비해 마을 사람들을 화물차에 태워 북쪽으로 끌고 갈 계획이라고 알려왔다. 보유한 장비가 개인별 소총 1자루와 실탄 10여 발뿐이었지만 망설임도 잠시, 국가와 국민을 보호한다는 군인 본연의 임무를 되새기며 작전에 들어갔다.

9월 21일 유격대는 날이 어두워지자 내곡리 마을 주변까지 접근해 도로에 매복 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 수송부대를 기다렸다. 오후 11시 내곡리를 출발한 적 수송대가 통과하자 습격을 시작했고, 조영달 생도가 "우리는 육사 생도들이다. 얼른 피하시오"라고 외치자 많은 사람들이 여러 방향으로 탈출해 적에게서 벗어났다.

하지만 유격대원들은 탄약을 다 써 버렸고, 그렇게 불암산 기지로 복귀하지 못하고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서울 수복을 불과 1주일 앞둔 상황에서 치른 호랑이 유격대의 마지막 전투였다.

유격대가 근거지로 삼아 활동한 남양주 불암산 제3동굴.
유격대가 근거지로 삼아 활동한 남양주 불암산 제3동굴.

# 끝까지 국민을 지킨 유격대 기록

유격대는 조금만 버티면 생존이 가능했는데도 전투를 택했다. 이들의 기록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강원기 1기 생도 증언으로 알려졌다.

마지막 전투에서 오른팔에 관통상을 입어 도랑에 굴러떨어져 의식을 잃었지만,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이 발견해 목숨을 건졌다. 서울 수복 이후 국군병원으로 후송했지만 1951년 7월 10일 부상 후유증으로 세상을 등진다. 그는 자신을 문병한 동기생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전달했고, 때마침 동기생들의 참전 체험담과 자료를 수집 중인 남상선이 이들의 이야기를 「불멸탑의 증언」이라는 책에서 자세하게 전달했다.

기록을 보면 1951년 7월 10일 동래 육군종합학교에서 연 육사 10기생(생도1기) 임관 1주년 모임에서 김홍일 장군은 "임관 20일을 앞둔 생도를 산병호에 넣어 희생시킨 용병술은 세계 어떤 전사에도 없으나, 희생으로써 조국 수호에 귀감이 된 사관생도들의 정신은 영원히 불멸하리라 본다. 그러므로 그들의 못다 한 영광을 깊이 되새 생환자들은 멸공 대열에서 최선을 다하겠다. 정의를 위한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라"고 훈시해 깊은 감동을 남겼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사진= <남양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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