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6월 13일. 중앙아시아의 한복판, 반사막지대와 가까운 사마르칸트다. 티무르 제국의 수도이며 세계 최고의 문화도시다. 국제회의를 준비하려고 학교에 갔다가 고고학과 사무실에서 루스탐 교수를 만났다. 그는 내가 부임했을 때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전해 줬다. 이 근처에 거란인들의 후예가 사는 마을이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인가?

우리는 오랫동안 좁은 땅에서 살았고 다른 나라와 교류도 없었던, 세계 역사에서도 드문 민족이다. 그러니 우리 옆에서 살던 거란족 후예들이 중앙아시아 여러 곳에서 마을을 이룬다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을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알려서 좁은 공간감각, 정적인 사고로 역사를 해석해 온 습관에 혼란을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 유라시아의 역사, 동아시아의 역사 그리고 한민족의 역사를 또 다른 관점, 더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계기를 마련하니까.

거란이 누구인가? 6세기 후반 중국 사서들에는 거란어·선비어·두막루어(부여가 세운 나라)가 통했다고 기록했다. 그런 기록을 근거로 삼지 않아도 거란은 출발부터 우리와 혈연적으로,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관련이 깊었다.

거란은 야율아보기라는 천재가 등장해 발해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공격해 북중국 지역에 요나라를 세웠다. 번성하던 요나라는 결국 만주에서 일어난 퉁구스계, 즉 여진족에게 공격을 받고 멸망 위기에 처했다. 이 다급한 상황 속에서 왕족인 야율대석은 불과 200여 명 남짓의 군사들을 이끌고 탈출했다. 그는 몽골 지역을 거쳐 숱한 전투를 치르며 서쪽으로 오다가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지역으로 들어왔다. 빠른 속도로 성장한 그들은 중앙아시아 패권을 장악한 후 ‘카라 키타이’, 즉 ‘검은요(黑遼)’라는 국명의 제국을 세웠다. 이곳에서 만난 사현지 사람들은 내게 항상 ‘키타이?’라고 물어본다. 카라 키타이의 역사 때문에 이곳에서는 아직도 중국을 ‘키타이’, 즉 ‘거란’이라고 부른다. 실은 캐세이항공도 거란에서 나온 이름이다.

조교인 알리 선생과 함께 루스탐 교수의 안내를 받아 그 마을을 찾아 나섰다. 시내를 벗어나 북쪽의 지작주를 향해 달려가다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길가의 사람들에게 몇 번 물어본 끝에 한 집에 들어갔다. 여러 사람들이 우리를 반겼는데, 분주하게 움직이는 여인네들 가운데 한 여인이 예쁜 모자를 쓰고 끝에 구슬장식이 매달린 반투명한 천을 내려서 얼굴을 가렸다. 마치 페르시아 무희나 궁녀, 공주 같았는데 그제 결혼한 새신부였다.

우리 일행을 탁자에 앉히고는 젊은 주인과 그의 아버지, 아들들, 조카들은 앉거나 선 채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주인 남자는 타슈켄트에 있는 어느 대학의 교수였다. 그의 아버지인 노인은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이었고, 어머니는 언어선생님이었다고 한다. 아주 지적인 동시에 부유한 집안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곳이 거란족 후예가 사는 마을이 맞는지 물었다. 주인은 그러한 이야기들이 전해온다고 답변했다. 난 긴장하면서 혹시 거란과 연관된 책이나 그림 또는 물건들이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그런 것은 다 없어진 듯하다고 말했다.

다소 실망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서 몇 가지 특이한 점들을 발견했다. 우선 할아버지의 얼굴이 너무나 우리와 닮았다. 표정, 말투, 손짓, 자식들과 손주들을 대하는 모습이 너무나 낯익었다. 할머니는 마주앉은 아내의 얼굴과 모습을 보고 자기네와 너무나 닮았다고 들떠서 말했다. 집주인은 날래고 눈매가 매서운, 얼굴선도 칼날같은 전형적인 칭기즈칸 외모였다. 이 집의 마스타바(국수와 감자, 밥을 섞은 국밥) 역시 사마르칸트나 다른 곳의 음식맛과는 분명히 달랐다. 향료를 거의 쓰지 않아서 거부감이 없었다. 이곳 음식에 좀처럼 적응 못하는 아내마저도 우리 맛과 같다고 하면서 아주 잘 먹었다.

그리고 꼭 거란족과 연관시키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잃어버렸고 잊어버린 옛날 모습들을 여러 부분에서 확인했다. 손님인 우릴 위해 한상 잘 차려놓고는 쉬지 않고 먹을 것을 권했다. 잠시 후에는 대학생 아들이 기타로 전통음악을 연주하니까 할머니가 일어나고, 이어 어머니와 할아버지까지 춤을 췄고, 새신부까지도 여린 손짓을 하면서 어울렸다. 청년은 해금과 유사한 전통악기로 바꿔 들고 나오더니 거란족(?)의 목소리로 전통노래를 불렀다. 결국 손님인 나도, 아내도 신나게 춤을 췄다.

루스탐 교수는 거란인 마을로 추정되는 곳이 여러 곳 있으니 다음에는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고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거란의 후예들이 이 먼 곳에서 살았다는 단서를 잡았다고 생각한 나는 마음이 너무나 흡족했다. 그렇다면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사신단의 후예들 그리고 고선지를 따라서 750년 석국 전투, 751년 탈라스 전투에 참여했던 고구려 후예들의 마을도 남았을 가능성은 높아진다. 

저녁 무렵 사마르칸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가 작사한 ‘광개토태왕’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졌다. 고구려 병사로 환생한 듯 온몸에 기운이 차오른다. 언젠가는 꼭 고구려 마을을 찾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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