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재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이훈재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의과대학 교수인 필자는 기회가 될 때마다 "인천 지역사회의 특성과 자랑스러운 역사를 이 지역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다른 인천 사랑이나 독특한 교육철학을 가져서가 아니다. 좋은 의사가 되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 지역 필수의료 강화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진다. 의사가 많이 부족하니 의과대학 정원을 늘려야 하고, 아예 공공의대를 설립하자는 시민사회 요구가 거세다. 반면 소신 있는 의사들이 더 이상 좌절하지 않도록 정부가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는 게 우선이라고 의료계 역시 큰 목소리를 낸다. 그런데 의사 수를 늘리고, 소신 있는 의사들에게 적정 보상을 해 준다고 지역 필수의료가 충분히 견고해지진 않을 듯하다. 필수의료가 강화되려면 의사들의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와 책임의식 그리고 자긍심과 사랑도 더 깊어져야 한다.

의학은 보편성과 과학성이 생명이지만, 지역 특이성이 아주 중요하다. 의과대학을 전국 시도 지역마다 골고루 분산 설립한 이유는 바로 의학의 지역 특이성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의과대학 교육과정에서 외국 교과서 내용을 기반으로 의학의 보편성과 과학성을 가르치는 데 편중한다면 이것은 모순이다.

소의치병(小醫治病), 중의치인(中醫治人), 대의치국(大醫治國). 의사 출신 중국의 혁명가 쑨원의 명언으로 알려진 이 말은 의사들이 자주 인용하는 멋진 표현이다. 필자는 이를 풀어서 "보통의 의사는 환자의 병 치료에만 치중하지만, 보다 나은 의사는 환자의 고통과 삶의 어려움도 덜어주려 하며, 훌륭한 의사는 사람들을 아프게 만든 사회환경 변화를 위해서도 노력한다"고 학생들에게 설명한다. 인천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의료를 행하고자 한다면 시민 삶과 그 환경을 이해하는 일이 기본이다.

이부망천(離富亡川). 수년 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이 용어는 얼핏 고사성어처럼 들리지만, 어느 정치인의 실언에서 유래한 신조어에 불과하다. "서울에서 잘 살던 사람이 이혼하면 부천 정도로 이사를 가고, 부천에서 경제적으로 더 어려워지면 인천 원도심 쪽으로 옮겨 가는 경향"을 불량한 보건사회지표의 핵심 원인으로 진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그러한 경로로 인천에 정착한 지인을 여지껏 접해 본 적이 없다. 이부망천은 보통 시민 경험이나 정서와 한참 동떨어진 표현이지만, 인천의 사회양극화 또는 격차 현상이 심하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보건의료 영역이 특히 그러하다. 

"의사들이 환자들을 치료한다고 해도 그들을 병들게 만든 사회로 돌려보낸다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의학교육자들이 경구(警句)로 삼는 이 말 또한 쑨원이 강조한 대의치국과 같은 맥락이며, 인천의 의과대학생은 이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의사라고 해 신분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함을 학생들에게 강조하기도 한다. 의사만큼 지역사회의 큰 기대와 배려를 받으며 만들어지는 직업은 없다. 심신의 고통을 겪는 와중에 수많은 환자들은 의과대학생의 임상수련에 기꺼이 협력하며, 심지어 이들의 해부학 실습을 위해 아무 조건을 달지 않고 시신을 기증하기도 한다. 의사는 당사자의 노력과 부모님의 헌신 그리고 스승의 가르침만으로 되지 않는다. 좋은 의사가 많아지기를 바라는 지역사회의 염원과 협력, 나아가서는 환자들의 숭고한 희생이 더해지면서 비로소 의사라는 전문 직업인이 지역사회로 배출된다. 따라서 의학을 공부한 지역에서 의사에게 요구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건 어쩌면 인간적 도리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의대 입시 광풍’이라는 제목의 보도가 이제는 낯설지 않다. 의과대학 쏠림 현상이 갈수록 심화한다. 의과대학 교수들조차 이런 현상을 걱정해야 할 정도다. 이와 관련한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의대 입시 경쟁이 극도로 치열해지며 인천의 의과대학에는 타 지역 출신 학생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됐다. 그리고 이들의 상당수는 의사면허 취득 후 미련없이 인천을 떠나기도 한다. 물론 출신 지역으로 되돌아가거나 더 좋은 환경에서 꿈을 펼치고자 함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의료의 지역 특이성과 의사의 사회적 책임 그리고 인천의 필수의료를 생각한다면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의과대학생들의 인천에 대한 자긍심과 사랑이 깊어진다면 다른 지역으로 이탈하는 현상이 어느 정도 줄지 않을까?

인천은 겹겹이 쌓여진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의 도시다. 그러나 의과대학생 대다수는 인천을 그저 그런 서울의 변방도시 정도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인다. 인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 기회가 없는 것이 주된 이유일 테다.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곳, 한반도와 세계를 잇는 지정학적 특성을 토대로 수천 년 동안 민족의 성장을 견인한 곳이 바로 인천임을 잘 알지 못한다. 

팔만대장경과 같은 찬란한 문화유산의 탄생지였고, 외세 침략에 항전하며 민족의 운명을 지킨 굵직한 역사가 인천에서 쓰여졌다. 새로운 문물의 유입 관문답게 유독 최초라는 수식어가 담긴 재미있는 유산들도 많다.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공원, 등대, 초등학교가 모두 인천에서 생겨났고, 국민 음식 짜장면의 발상지도 인천이다. 오늘날 인천 역시 세계적인 여객과 물류 중심 도시로서 의료관광과 바이오산업 등의 메카로 도약한다. 인천은 젊은 의사들이 도전과 발전을 도모하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터전이다.

좋은 의사가 되고자 하는 인천의 의과대학생은 인천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 이것은 인천의 필수의료를 굳건히 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인천의 의과대학, 인천시, 지역의사협회 그리고 시민사회가 이를 위해 의기투합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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