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이강동

중국 고대 국가에서는 국조명의·연호·칭호 따위로 서로 논쟁하는 일이 많았다. 민중 의견은 수렴하지 않고 관청 주도로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동식물 이름을 두고도 많이들 싸웠다.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기도 했다. 

중국 춘추시대에 궁궐에서 처음 보는 작은 동물이 잡혔다. 이름을 몰라 모두가 궁금해하던 중 궁궐에서 일하는 종군이라는 사람이 "「이아」라는 책에 기록됐는데, 이 동물의 이름은 ‘쥐’입니다"라고 알려 줬다. 임금은 종군에게 박학사라는 칭호를 줬다. 그때부터 「이아」는 「시경」과 함께 존중 받는 책으로 대접 받았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동식물 하나에 여러 이름을 붙였다. 본명·고명·별명·속명이 있었다. 모두 자신들의 고향과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이름을 사용했다. 지역마다 다르게 사용하는 복잡한 이름들을 하나의 명칭으로 통일시키자고 해서 시작된 게 물명의 학문이다.  금석·동물·식물·어류·벌레들의 이름을 바르게 알고 민중들에게 널리 알리자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이아」가 시초였다. ‘계몽소학’도 홍보했다고 한다.

인천 동구 만석동 지명과 작약도 지명이 일제 잔재라는 주장에 논쟁이 지속된다. 자료를 살펴보면 만석동 지명과 작약도 지명은 우리 고유 지명으로 확인된다.

만석동 주민들은 작약도 지명으로 다시 부르겠다는 여론이 많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았던 작약도 브랜드 가치는 지역경제에 큰 도움이 되리라 본다.

작약도는 조선 후기부터 외국 함대와 상선들이 찾아와 정박하며 조선 정부와 교류·교역을 위해 교섭에 나섰던 역사적 스토리가 많은 섬이다.

작약도 지명은 일제 잔재라는 오명을 쓰고 물치도로 바뀌었다. 작약도가 일제 잔재 지명이라고 동구청에 제기하자 역사적 자료 확인도 없이 곧바로 동구청·인천시·국가지명심의회에서 작약도 지명을 일제 잔재로 판정 내렸다. 1896년 인천 주재 일본영사가 본국에 보내는 서신에 작약도 지명이 나와 일본인들이 처음 사용했다고 보고 일제 잔재로 몰았던 것이다.

대동여지도에 물치도가 표기되기 전 조선시대 이전부터 작약도로 불렀다. 작약도 지명이 일제 잔재라는 주장에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니 일제 잔재라는 주장이 잘못됐다고 확인되는 자료들이 발견됐다.

더 놀라운 자료도 찾았다. 제물포에 항구를 건설한다며 1881년 1월 일본 정부가 개항장을 지정하자 조선 팔도에서 반대하고, 지역주민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 대규모 항의를 한 것이다.

개항장 명칭에서 파생한 개항동·개항로 지명이 대표적 일제 잔재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개항장이라는 용어를 함부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작약도 지명을 일제 잔재로 주장한 1896년 자료보다 더 오래전 외국 문헌에 작약도 지명이 나오기에 작약도 지명은 우리 고유 지명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인천 관인이 조정에 보내는 보고문에 외국인들이 찾아와 작약도에 정박했다는 내용의 자료도 있으며, 「금단의 나라 고려기행」의 저자 올펠트가 1866년 8월 2번째 찾아와 정박했던 곳이 작약도였다.

미 국무성과 미 해군학교 도서관에 보관된 1871년 인천 관련 문헌을 역주한 자료에서도 작약도 지명이 나온다.

작약도 지명은 경상도에도 있다. 경남 창녕군 연산면 교리에 작약산이 있다. 먼 옛날부터 전해오는 지명이라고 한다.

발견된 자료를 보면 작약도 지명은 일제 잔재가 아니다. 작약도로 부르자는 1천 명의 서명은 만석동 주민들 의견 수렴 없이 관청 주도로 이뤄진 지명 변경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었다. 자치운동이었던 향약의 4대 강령인 예속을 지키려는 만석동 주민들의 적극적 표현인 셈이다. 

작약도 지명 심의를 다시 할 수 있다는 국가지명심의회의 답변도 받았다.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는 브랜드 지명으로 작약도와 물치도 중 어느 것이 좋은지 설문조사해 확정한다면 논쟁의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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