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우리 헌법 제69조는 대통령이 취임에 즈음해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라고 선서하도록 규정한다. 즉, ‘헌법 준수’를 대통령의 제1 책무로 규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윤석열 대통령이 ‘헌법정신’의 존중과 실천을 자주 강조하는 것은 매우 합당하고 바람직하다. 

문제는 윤 대통령이 ‘헌법정신’을 존중하고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여러 차례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헌법정신’에 어긋나는 사례가 자주 발생해 사회 각계각층에서 심각한 우려를 제기한다는 점이다. 최근 논란이 빚어진 몇 가지 경우를 살펴보자.

첫째, 대법원장의 대법관 임명 제청권 행사에 대한 사전적 통제 의혹이다. 헌법 제104조 제2항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하는데,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은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법원조직법 제41조의 2)의 엄정한 추천 절차를 거쳐 이뤄진다. 

그런데 대법원장이 대법관 임명 제청을 하기도 전에 "특정 후보 2명에 대해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지 대통령실에서 검토한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삼권분립 원리에 위배되고, 사법권 독립을 해치는 위헌적 처사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또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에 법무부 장관도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대법관 후보 추천과 관련한 행정부 의견은 이미 반영됐음에도 제청 전에 "누구누구는 안 된다"는 강한 시그널을 보내는 건 대통령이 대법원장에게 특정 후보를 제청하지 말라고 부당하게 압박하는 것으로,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의 추천과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무력화시킨다. 앞으로 대통령이 대법관 임명 제청에 상시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둘째, 여권의 대법원 판결에 대한 극심한 폄훼와 대법관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이 사법권 독립을 침해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16일 대법원이 현대자동차가 사내 하청 노조(비정규직 지회) 조합원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심 판결 중 피고 패소 부분을 파기환송한 데 대해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격한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파업 손해배상 책임 개별산정’ 판결의 주심 노정희 대법관에 대해 "자신을 벼락 출세 시켜 준 더불어민주당에 ‘결초보은’하고 싶은 심정일 수는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명색이 대법관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나", "노정희 대법관은 법관 자격이 없다"고 정면 공격했다. 

그는 "공동불법행위의 책임을 연대해서 지도록 규정한 민법의 대원칙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지적했는데, 헌법상 노동3권 보장 취지를 고려해 민법적 법리가 노동법 영역에서 수정될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대법원 판결을 극한적으로 폄훼하고 대법관에게 인신공격을 가하는 행위는 과도하다.

셋째, 이른바 ‘시행령 통치’가 지속되는 것에 대해서도 위헌적 처사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시행령 개정을 통한 ‘검수원복’에 대해 비판이 지속되는 마당에 지금도 시행령 개정을 통한 무리한 질서 재편 기도가 계속된다(집회·시위의 자유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집시법 시행령 개정 추진, 노동조합 회계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노동조합법 시행령과 소득세법 시행령 개정 추진 등). ‘시행령 통치’는 법 효력의 위계를 무너뜨리는 ‘하극상’을 초래해 법치주의 근간을 훼손함으로 매우 심각한 위헌성을 지닌다는 점을 십분 고려해야만 한다.

넷째, 그 밖에 언론기관에 대한 압수수색이 시도되고, 기자와 비판자들에 대해 고소·고발이 빈번하게 이뤄지는 점에 대해서도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있다. 요컨대 ‘헌법정신’은 구호에 그쳐서는 안 되고 ‘내로남불’의 빌미가 돼서도 안 된다. 유신헌법 시절 민주주의의 보편가치를 부정하고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를 내세웠던 ‘사이비 헌법정신’의 시대로 회귀해서는 절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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