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석장(石匠)으로는 최초로 2007년 9월 17일 국가중요무형문화재 120호로 지정된 이재순 석장의 혼을 불어넣는 예술정신을 구리시 석조공예관에서 만났다.

석장(石匠)이란 석조물을 제작하는 장인으로, 주로 사찰이나 궁궐에 남은 불상·석탑·석교가 이들 작품이다.

삼국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다채로운 석조문화재가 전해져 우리나라 석조물 제작 기술이 상당한 수준임을 알 만하다.

석장 이재순 선생.
석장 이재순 선생.

석공예 재료는 전국에 걸쳐 가장 많이 분포한 화강암이 있고, 이 밖에 납석·청석·대리석을 사용한다.

이 중 포천·익산·거창지역 화강암은 입자가 고르고 석공예가들이 다루기 좋아 인기가 높다. 이 석장은 지역마다 다른 돌 특징은 그 지역 풍습에서 나오는 성격과 인성을 닮은 듯싶다고 했다.

전통 석장들은 망치와 정 같은 수공구를 사용해 돌이라는 단단한 물질에 혼신의 열정과 인고의 창작활동을 더해 생명력을 불어넣어 수준 높은 석조문화를 탄생시키고 발전시켰다.

석재는 인류가 자연에서 채득한 물질 중 그 연원이 가장 오래됐고, 역사와 문화 진전 과정에서 늘 함께한 소재다.

더구나 대다수 석조문화재가 석재 중 강도가 가장 높은 화강암으로 이뤄져 가장 한국다운 문화의 한 유형으로 석장(石匠)의 기술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석장에 대한 기록이 미미해 석장 실상을 파악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석조문화는 당시 석장들이 지녔던 뛰어난 예술 감각과 창의성은 물론 깊은 신앙심을 엿보게 한다.

숭례문 복원작업 중인 이재준 석장.
숭례문 복원작업 중인 이재준 석장.

# 열네 살 때 맺은 돌과 인연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석장 기능보유자 이재순 석장은 1955년 12월 16일 전라남도 담양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 석장은 어린 시절 집안이 송사에 휘말려 아버님이 홧병으로 항상 몸져누웠던 기억밖에 없다고 회상한다.

또래 중 손재주가 남달라 썰매나 연을 만들기 좋아하던 이 석장이 처음 돌과 인연을 맺게 된 시기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던 14세 때라고 한다. 

이 석장 집안이 석공일과 인연을 맺은 시기는 1960년대 초반 이모가 전라남도 광주(현 광주광역시) 한 석재공장 현장에서 일하면서부터다.

이 석장은 석공일을 하던 외삼촌들과 형 요청으로 일을 도와줬다. 처음에는 학비를 벌 생각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차츰 돌에 재미를 느끼면서 본격 일을 배웠다.

당시 석공 월급은 다른 업종에 견줘 매우 높았는데 경제 이유로 외삼촌들과 형이 석공 일을 먼저 시작했고, 뒤이어 이 석장이 외삼촌들과 형 밑에서 1년 남짓 일했다.

한국 화강암으로 만든 불상의 미소가 눈길을 끈다.
한국 화강암으로 만든 불상의 미소가 눈길을 끈다.

# 스승 김진영 선생과 만남

이 석장은 1970년 형과 함께 서울 창동에 작업장이 있던 당시 유명한 석공인 김부관 선생을 찾아가 6개월 정도 일을 배웠다. 이곳에서 돌의 평면을 다듬는 치석 작업을 할 정도로 기량을 닦았다.

이후 1972년 16살 무렵 석공 인생에서 스승이라 할 만한 김진영 선생을 만난다. 당시 김 선생이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소식을 듣고 망우리에서 활동하던 김 선생 작업장을 찾아가 문하생이 됐다.

처음부터 석조각을 배우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김 선생과 인연이 되면서 본격 석조각 일을 시작했다.

이 석장은 비록 돌 깨는 치석은 외삼촌과 김부관 선생한테 배웠지만 석공 스승으로 주저 없이 김진영 선생을 꼽는다.

일에 대한 눈썰미와 성실함으로 남보다 빨리 일을 배웠지만, 그러다 보니 시기하는 이들도 생겨났고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이때 작은 실수가 커지면서 몇 개월 되지 않아 작업장에서 나왔다. 그러나 당시 시련이 선생을 진정한 석장의 길로 이끄는 전환점이 됐다.

# 진정한 작품세계로 들어선 제2 도약

작업장을 나와 잠시 방황하며 여행을 하던 선생은 불교 신자인 어머니와 함께 경주 석굴암에 들렀고, 이곳에서 본존불을 비롯한 석불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김진영 선생을 찾았다.

이 석장은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배우며 12년 정도 일했지만 석조각 기법에 대해 하나하나 섬세한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치석을 시작한 지 7년 정도를 넘어서면서 전체 조각을 할 정도의 기량을 닦았다. 

이 석장은 김진영 선생이 새로운 형태의 작업을 하거나 모임이 있을 경우 함께할 기회가 많았는데, 다양한 조각이나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견문을 넓혔다. 이런 경험은 훗날 작품을 구상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돼 불상이나 불탑을 비롯한 석조 분야에서 뚜렷하게 두각을 나타냈다.

이 석장은 스님들과 교분을 쌓으면서 불교에 대한 이해를 넓혔고, 자연스럽게 작업에 접목해 깊이 있는 좋은 작품을 만들었다.

불상을 조각하는 일은 단순한 조각 의미를 넘어 불교사상에 대한 이해를 전제해야 한다. 돌에 마음속 혼을 불어넣지 않으면 그 조각은 생명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숭례문 모습.
숭례문 모습.

# 국제기능올림픽 석공 분야 금상 수상

1976년 전국기능경기대회와 1977년 22세라는 젊은 나이에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석공 부문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곧바로 같은 해 7월엔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후 1991년 다산문화대상을 비롯해 대한민국 불교미술대전, 전승공예대전 들 각종 공모전에서 수많은 수상을 기록하면서 불교계는 물론 석공으로서 국내외에 명성을 날리며 구리시를 대표하는 장인으로 남는다.

이 석장은 1979년 ‘대한석상’이라는 개인 작업장을 내고 홀로 서기를 시작하면서 이전보다 조각에 대한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1981년에는 주변 소개로 최종태 전 서울대학교 교수를 만나 조형미술에 관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즈음 그는 또 다른 은인 동화문화센터 김영중 선생을 만나 7년 동안 인체 해부학을 공부해 전통조각과 현대조각을 이해하고 이론과 철학을 담아내는 석조각의 진수를 터득할 기회를 마련했다.

# 불상·불탑 관련 석조 분야서 두각

이 석장은 석조 모든 분야에서 우수한 기능을 갖췄지만, 그 중에서도 불상이나 불탑과 관련한 석조 분야에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

그는 수많은 문화재 보수 재현 작업도 수행했는데, 월정사석조보살좌상과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 미륵사지 복원, 북관대첩비 복원, 숭례문 성곽 복원공사를 비롯해 그동안 이 석장이 복원하거나 제작한 작품은 수천 점에 이른다.

더구나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인 영광 법성포에 조성한 주요 작품은 대부분 이 석장이 만들었다. 영광 법성포는 AD384년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가 중국 동진을 거쳐 처음 발을 디딘 곳이다. 간다라 불교문화 양식을 한눈에 보는 이 성지(공원)를 이 석장 손으로 만들어 스승이 극찬했다.

백제불교 도래지인 법성포에 사찰 건립이 한창인 가운데 사면대불상이 우뚝 섰다.
백제불교 도래지인 법성포에 사찰 건립이 한창인 가운데 사면대불상이 우뚝 섰다.

전국 사찰과 문화재가 있는 곳에는 이 석장 손때가 대부분 묻었다. 그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유트리트 박물관, 이탈리아 카라라시청, 일본 덕정사, 타이완 자항기념당, 프랑스 파리 7대학에도 이 석장 작품을 보관할 정도로 국내외에서 실력을 인정받는다.

1958년 입적한 자항대사를 기리려고 세운 타이완 자항사(慈航寺) 자항기념당 아미타불 조성사업은 50여 년 동안 진행한 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자항사 스님과 신도들은 세계 각국 유명한 석불을 보며 한국의 석굴암 본존불이 최고라는 결론을 내렸고, 여러 심사를 거쳐 이 석장에게 불상 조성을 의뢰했다. 석굴암 본존불보다 1.7배나 큰 거대한 불상은 꼬박 2년 반이 걸려 1995년 완공했다.

불상 규모가 너무 크다 보니 타이완으로 보내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무사히 도착해 아미타불이 자항기념당을 막 봉안했을 때, 마침 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이 걷히고 평생 한 번 봄 직한 방광(오라)을 보고 신도들이 탄복했다고 한다.

뿌듯한 마음과 어릴 적 처음 석굴암 본존불 앞에서 발원했던 그 순간과 함께 그때 "아! 이게 부처님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 전통 석장 맥을 잇다

이 석장은 400여 년 전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심당길 후예로 일본 가고시마 특산품 사쓰마 도기 대표로 15대를 이어가는 가문 심수관 가문처럼 전통 석장 맥이 후대에도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그는 보유자이기 전에 선배 석공으로서 우리 화강석문화를 발전시킬 석장의 맥을 잇는 일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여긴다.

다행히 대학에서 조소과를 전공한 이 석장 장남 이백현(42)씨가 가업을 이을 재목으로 15년간 부친 가르침을 받으며 열심히 실력을 갈고닦는 중이다.

여기에 기능올림픽 입상자, 숙련기술인 같은 명장 반열에 오른 조각가 50여 명이 후진을 양성하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정부에서 9월 9일을 숙련기술인의 날로 지정해 기념한다.  구리=

윤덕신 기자 dsyun@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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