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자신의 전부를 바쳐 발군의 업적을 남긴 또는 남기는 사람을 장인(匠人)이라고 한다.

이쪽저쪽 세상사에 기웃거리지 않고 오직 자신이 선택한 외길만을 걷는 일은 외롭고 힘든 긴 여정이다. 그래서 대다수 보통 사람들은 그 외길을 선뜻 선택하지 못한다. 혹은 스스로 선택했다 한들 그 여정이 너무 힘들고 혹독해서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

그만큼 장인은 수도승처럼 강인한 인내력과 주변 유혹을 과감하게 떨쳐 낼 큰 용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오늘은 이런 장인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 사람은 한평생 나무에 각종 생명을 불어넣기로 유명하다. 바로 한봉석 목조각장이다.

용맹정진(勇猛精進)하듯 살아온 한봉석 목조각장을 짧은 지면으로 소개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어쩌면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지면으로 한봉석 목조각장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목조각을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무례를 범한다.

경기도무형문화재 49호 한봉석 목조각장.
경기도무형문화재 49호 한봉석 목조각장.

# 경기도무형문화재 49호

한봉석 목조각장은 나무를 만지면서 쌓이는 톱밥만큼 불자의 마음이 높아진다고 한다.

이천시 설봉공원에 자리잡은 무형문화재 전수관에는 이천지역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활동하는 가운데 도자기 무형문화재와 벼루장인, 이천거북놀이를 비롯한 무형문화재와 함께 무형문화재 49호인 한봉석 목조각장 공간을 마련했다.

불상이나 불화를 조성하는 사람을 흔히 불모(佛母)라고 한다. 부처님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불모 조각가로 알려진 한봉석 목조각장은 1993년 불국조각원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서울 봉은사 사천왕상, 대구 북지장사 닫집, 수원사 불단과 닫집을 비롯해 다수 작품을 봉안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전통미술 공예부문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한 그는 6년 전 이천시 백사면 상용리에 불국조각원 터를 잡고 이천시민을 대상으로 ‘목공인생학교’를 운영 중이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그는 해외에 유출된 문화재를 재현해 유출 문화재 운동에 참여한다. 2021년에는 해외 유출 문화재 환수운동의 마중물 노릇을 하려고 해외 반출 문화재 재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당시 전시한 작품은 백사면 불국조각원에서 감상 가능하다.

다양한 불상 조각들.
다양한 불상 조각들.

# 50여 년간 이어진 나무사랑

1972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소년 한봉석은 중학교 진학 대신 아버지 지인이 운영하는 서울 한 공예사에 취직한다.

을지공예사 목조각부에서 조각에 입문한 그는 어린 나이인데도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욕구가 확고했기에 목공예에 관한 관심을 조금씩 키워 나갔다.

하지만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이여서일까? 그가 할 만한 일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칼이 아닌 연필을 가장 먼저 잡았는데, 선배들이 그린 도면을 일일이 손으로 그려 복사본을 만드는 일이 그의 첫 번째 업무였다. 그림 작업이 끝난 뒤엔 선배들이 깎아 놓은 조각품을 사포로 다듬는 일까지 그의 몫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을지로 목공방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선배 지시에 따라 나무에 사포질을 했죠. 제 손길이 닿을 때마다 달라지는 나뭇조각을 보면서 ‘나도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하겠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겼나 봐요."

그렇게 2~3년 동안 사포질을 한 한봉석 목조각장. 그러던 어느 날, 지금 자리에서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에 퇴근도 미뤄 둔 채 다음 날 해야 할 사포질을 하루 일찍 끝내 놓았다고 한다.

"‘할 일을 미리 끝내 놓으면 다음 단계 일을 시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퇴근도 하지 않고 밤새 나뭇조각 형체를 잡고 사포질을 했어요. 결국 그런 저의 모습을 보시곤 한 선배가 ‘할 일 다 끝냈으면 끌질을 해 봐라’ 하며 제게 칼을 건넸죠."

성장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다는 한봉석 목조각장은 18살에 독립의 꿈을 이뤘다. 채 20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지만 어깨 너머로 배운 모든 일들이 그에게 교과서가 됐기에 두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고객을 위한 목공예품을 만든 그에게 운명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선배 전시회를 도우려고 불교 조각에 도전하게 됐다. 그 짧은 순간, 불교 조각에 매력을 느낀 한봉석 목조각장은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불교 조각을 조금 더 제대로 배워 볼 방법을 찾아 나섰다.

하고 싶다는 마음에 이러한 열정이 더해져서일까? 1994년 불교미술대전 입상, 10년 뒤인 2004년 불교미술대전 특선, 2010년 경기도 제49호 무형문화재 지정으로 이어졌다. 2018년에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전통미술·공예 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돼 국전심사위원으로 활동한다.

흥국사 부처님 광배 재현.
흥국사 부처님 광배 재현.

# 배움에 대한 열정을 키워 준 목조각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한봉석 목조각장은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자신의 단점을 나무 홈 메꾸듯 채워 나갔다.

"제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에요. 하지만 목조각장이란 직업을 가진 뒤 조각에 뜻을 더하려고 검정고시를 준비했습니다.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에는 조계사 불교대학과 여주대학교에서 도예과를 전공했죠. 이후 동국대학원 문화예술대학원 문화재과 석사과정을 수료했고, 지난 2월 중순 충북대학교 문화재학과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처럼 불자의 마음으로 불교 조각을 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는 한봉석 목조각장. 그는 문수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비롯해 보살이 품은 각각의 뜻을 얼굴에 담아내려고 쉼 없이 책을 펼치고 절을 찾았다.

"조각 자체에만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해요. 어리석은 중생을 살피는 문수보살을 알아야 문수보살 얼굴을 조각하듯, 석가모니 부처님을 조각할 땐 부처님 마음으로, 지장보살과 문수보살을 조각할 땐 각각의 보살로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 목공장과 학자 사이를 잇는 다리 구실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된 뒤 한봉석 목조각장은 조각이 돈벌이 수단이 아닌 평생을 함께할 생활의 일부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뒤 조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려고 힘썼습니다. 제가 계속 공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값’을 하기 위해서죠. 현장 업무뿐만 아니라 학술 부문도 더 자세히 깨달아 학자와 장인 사이의 다리가 되는 일이 제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또 목조각에 뜻있는 후학을 양성하는 일도 제가 이루고픈 꿈 중 하나입니다."

칼질을 할 때마다 떨어지는 나뭇조각을 ‘칼밥’이라고 한다. 그렇게 칼밥이 ‘사각사각’ 나올 때, 망치의 ‘땅땅’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울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봉석 목조각장은 말한다.

한봉석 목조각장.
한봉석 목조각장.

"손에 익은 작업 도구를 보면 끝부분이 다 뭉개져 있잖아요. 목조각하는 사람들은 이를 보고 ‘꽃이 피었다’고 말해요. 세월이 지날수록 꽃핀 작업 도구들이 많아지는 상황이 목조각장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실제 한봉석 목조각장 조각칼에도 꽃이 한 가득 피었다. 그리고 그 조각칼을 잡는 한봉석 목조각장 모습을 본 순간, 그 꽃은 사계절 내내 활짝 피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2010년 3월 2일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9호에 지정된 목조각장이다. 1994년 불교미술대전에 입상했고, 2004년 불교미술대전에 특상을 받았다. 이후 문화재청장 공로상을 수상했고, 현재 충북대학교 문화재학과 겸임교수로서 후학을 양성 중이다. 대표작으로는 원주 구룡사 대웅전 삼존불과 닫집, 서울 관악산 성주암 삼존불과 후불목각탱이 있다. 

이천=신용백 기자 syb@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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