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347)은 저서 「국가론」에서 지혜의 덕을 갖춘 철인(哲人)이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는 ‘철인정치론’을 주장했다. 

지도자가 철인이라면 그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주는 독재정치가 더 효율적이고 국민들이 살기 좋은 정치 시스템이 될 수도 있다는 관념마저 열어 둔다. 말하자면 철인에 대한 무한 신뢰를 전제로 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과연 이 세상에 ‘완벽한 철인’이 존재하는가? 

인류 역사를 들여다보면 존경받던 철인과 현자들이 타락하고 표변한 사례들이 많다. 

인간은 이기적 본성을 지녔기에 감시와 견제가 조금만 소홀해지면 타락하고 변절하기 쉽다. 따라서 철인의 등장을 무작정 고대하기보다 지도자의 타락을 효과적·효율적으로 방지하기 위한 제도(감시와 견제장치)를 구비하는 편이 정치인의 권력 남용에서 국민 권익을 보호하는 데 훨씬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편이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불신과 의심’을 전제로 탄생한 정치제도다. 

인간은 언제든 타락할 수 있기에 지도자를 무한 신뢰하기보다 지도자가 타락하지 않도록 예방조치를 철저히 갖추도록 하는 제도다. 

대표 기본 원리가 곧 ‘권력분립론’이다. 국가의 권력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기보다 입법권·행정권·사법권으로 분립해 각기 다른 기관에 부여함으로써 상호 간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을 이루게 하자는 이론이다.

생각해 보면 ‘불신과 의심’은 민주주의가 태동하게 된 전제일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인류 역사를 발전시켜 온 원동력이다. 

학문과 문화 발전도 기존 이론과 관념에 대해 ‘불신과 의심’을 제기한 데서부터 비롯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주저함과 거리낌 없이 ‘불신과 의심’을 자유롭게 제기하고, 그러한 ‘불신과 의심’이 합리적으로 해명되는 여건을 제공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합리적 ‘불신과 의심’을 ‘괴담’으로 치부하며 모욕죄·명예훼손죄 따위 죄목으로 고소·고발하는 등 입막음하려 드는 것은 ‘양심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건강과 발전을 근본적으로 저해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두 가지 점을 살펴보자.

첫째, 최근 헌법에 규정된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논의가 여야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제기된다.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비리를 저지른 국회의원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방탄국회’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 한다. 일단 수긍이 가는 측면이 있기에 국민 여론도 상당 부분 동조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일각의 주장과 국민 여론만으로 쉽게 재단할 사안이 아니다. 

우선 ‘불체포특권’이 헌법에 도입된 배경을 생각해 보자. 

‘불체포특권’은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이 체포 위험을 부담하지 않고 얼마든지 자유롭게 의정활동(국정 운영에 대한 ‘불신과 의심’ 제기 등)을 하도록 하고자 도입한 제도다. 

따라서 ‘불체포특권’은 헌법 규정에 의해 국민이 국회의원에게 부여한 공권(公權)이며, 이를 마치 개인이 맘대로 포기(처분)할 수 있는 사권(私權)인 듯 얘기하는 건 불합리하다. 즉, ‘불체포특권’ 포기 논의는 섣부르고 경솔하며 ‘소탐대실’을 초래할 우려가 크고, 헌법의 명문규정(제44조 제1항)을 위배하고 ‘사문화(死文化)‘하는 매우 위험한 처사다.

둘째, 최근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이 이뤄진 경위와 배경을 두고 야당과 국민들에게서 ‘불신과 의심’이 제기됐는데,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느닷없이 "사업을 백지화한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방적 선언을 해서 사회적 공분을 산다. 

원 장관은 국민이 제기하는 ‘불신과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노선 변경이 이뤄지게 된 경위와 배경을 소상히 해명해야 한다. 

그러한 설명 의무를 회피하며 ‘사업 백지화’를 선언한 건 주권자인 국민을 섬겨야 한다는 공직자의 본분을 심각하게 위배하는 행위고 ‘비겁한 도망’이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