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인천을 대표하는 또 다른 지명으로 제물포를 모르는 이는 없다. 인천이 개항한 이래 제물포는 항구로서 인천을 대표하는 지명으로 자리잡았고, 그런 연유로 해방 이후에는 잠시나마 인천을 제물포시로 변경 시행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제물’이란 명칭이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지, 또 그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가 남았다. 

단지 그 유래에 대해 ‘제물’을 ‘제수(濟水)’로 의역해 곧 ‘물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인천 앞바다의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워낙 커서 물때에 맞춰 배를 대지 않으면 갯벌에 배가 얹혀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는 설명이다. 또 이곳이 포구인 만큼 ‘제물’은 ‘건널 제(濟)’자와 ‘물’의 소리만 따서 ‘물을 건너는 곳’이라 해 물자를 건네고 또는 그곳의 물자를 받는 사람과 일반 물자들을 모두 건너게 해 주는 곳으로 풀이한다. 모두 포구와 관련해 나온 해석이다.

제물(濟物)과 관련한 최초 명칭은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온 서긍이 1123년(고려 인종 1)에 편찬한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는 책자에 ‘최초’로 나타난다. 송나라 사신 일행은 개성에 도착하기 전 자연도(현재 영종도)의 사신 전용 접대처인 경원정에 머물렀는데 접대 일정을 마친 후 송나라 신종(神宗, 1078~1085) 연간에 자연도(紫燕島)에서 객사한 사신 송밀(宋密)을 추모하고자 ‘제물사(濟物寺)’에서 불승의 공양과 함께 제사를 드리고, 무덤 아래에 둘러서서 배례했다고 기록했다. 제물사는 이름자 그대로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구제하기 위해 세운 사찰로, 제물사 참배는 당시 무사 항해와 귀환을 기원하는 의미에서도 반드시 행해야만 했던 통과의례였다.

제물사에 대한 기록은 고려 후기 문인들이 지은 시(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규보(1168~1241)는 1219년 계양부사를 지내면서 많은 시를 남겼는데 자연도 ‘제물원(濟物院)’의 정자에 올라 지는 해와 바다의 경치를 보며 느낀 감상을 읊었다. 또 목은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1298~1351)은 「가정집(稼亭集)」을 남겼는데, 그 내용 중 1329년 예성강에서 강화도를 거쳐 자연도에 도착한 것과 관련해 ‘숙제물사(宿濟物寺)-제물사에 묵으며’를 남겼다. ‘제물’이란 명칭은 고려 후기까지 내내 유지됐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제물포를 의미하는 지명이 최초 등장한 공식 문서는 「세종실록지리지」로, "제물량(濟物梁)은 인천군 서쪽 15리에 있다. 성창포(城倉浦)에 수군 만호(萬戶)가 있어 수어(守禦)한다"고 기록했다. ‘양(梁)’은 일반적으로 섬 또는 다른 육지로 건너가는 징검다리를 의미하는 해양 지명으로, 특정 포구에 붙여진 것이 아니라 인천 앞바다를 통칭했으며 당시 성창포, 섭도포, 북송포, 탁포 등이 모두 여기에 속했던 작은 포구였다.

이 해역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삼남(三南) 지방의 곡식을 한양으로 운반해 올리던 중요한 해상교통로가 됐는데, 이 포구들 가운데 군수기지 창고였던 성창포가 가장 일찍 개발돼 군사적 목적뿐만 아니라 안전한 세곡(稅穀) 운반을 위해 만호(종4품, 현재의 계급으로 중령급)에게 삼남(三南)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조운선(漕運船)의 호위를 맡겼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제물량영(濟物梁營)’은 바로 성창포 군항(軍港)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창포는 제물포의 초기 이름이었다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제물포라는 지명은 영종도 제물사라는 사찰 이름에서 유래해 고려 후기까지 이어지고, 이러한 연유로 영종과 인천의 앞바다는 조선 초기 제물량으로 명명됐으리라 본다.

여러 기록에서 나타나는 제물사(寺), 제물원(院), 제물량영(濟物梁營), 제물진(鎭), 제물진(津) 같은 지명은 시기에 따라, 제물포 기능에 따라 분류됐을 뿐 그 명칭은 그대로 전승됐다.

최근 제물포라는 지명은 제물포르네상스로 이어져 21세기 인천을 선도한다. 인천의, 인천에 의한, 인천을 위한 거대한 작업이 명실상부 역사에 남겨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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