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외형 복원의 달인! 50년 동안 깨지고 부서진 자동차 판금·도색 작업을 천직으로 알고 산 광주시 쌍령동 ㈜대산현대모터스 김남용(69)대표.
 

강원도 주문진 빈농에서 3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9살 때 모친이 병으로 사망하고 계모 밑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6학년인 14살 때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전농동에서 시계공장을 2년간 다니다 형님 소개로 신설동 OK자동차공업사 판금부에 입사해 오늘날까지 50여 년간 오로지 자동차 판금 외길 인생을 산다.

지금이야 자동차 사고가 나면 새 부품 또는 중고 부품을 구해 바꿔 끼우기만 하면 새 차가 되지만 그때는 부품이 워낙 귀해 대부분 직접 손으로 밤새 두드려 만들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작업반장의 온갖 욕설과 이유 없는 뭇매를 견디며 망치와 철판 하나만으로 자동차 문짝을 만드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일은 말 그대로 피눈물 나는 과정이었다.

판금·도장 작업 또한 지금은 보호 장비를 갖추고 안전시설에서 하지만 예전에는 안전시설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어 오로지 몸으로 때웠다고 김 대표는 회상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고단한 작업을 피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틈틈이 중학교 검정고시 공부와 철판을 두드리다 아침을 맞는 날이 많았다.

학력도 남들 앞에 내놓을 게 없고 비빌 언덕도 없음을 스스로도 너무 잘 알던 김 대표는 인생 최종 목표인 ‘공업사를 꼭 창업하겠다!’는 큰 꿈을 위해 참고 또 견디며 철판을 두들겨 신속히 무엇이든 만들어 내는 기술을 연마했다.

"빠른 시간에 무엇이든 만들어 낸다"며 김 씨의 손재주가 업계에 소문 나자 다른 자동차공업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그는 1978년 오성자동차를 거쳐 제니미, 앨프 등을 생산하는 당시 대형 회사인 새한자동차 판금부에 입사해 동료들에게 ‘판금의 달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진가를 발휘했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가정에 태어난 김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살았기에 당시 국내보다는 월급을 많이 주는 중동 해외 현장을 나가고자 H건설 해외현장 파견근로자 시험에 응시했으나 왜소한 체구 탓에 면접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고 결심하고 또다시 현대건설의 말레이시아 케냐르댐 공사 현장 중장비 판금부 사원 모집 시험에 응시했다. 이 같은 열정이 통했는지 현대건설은 그의 작은 체구보다는 손재주를 인정했다. 그는 댐 공사 현지에서 40t·50t 대형 트럭 판금을 2년간 한 뒤 이라크 현장으로 또다시 진출, 외형 복원 일을 수년간 더 하고 국내에 들어와 미8군 차량 판금을 하다 강남의 선진자동차공업사 판금반장을 지냈다.

김 대표는 30여 년간 국내외에서 습득한 수많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2000년 드디어 ‘1급종합자동차공업사’를 성남시 종합시장 근처에 창업하고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이후 10여 년간 성남에서 기술을 인정받아 모은 돈으로 현재 광주시 경충대로 1507의 14에 1천650㎡ 규모의 사업장을 마련해 2013년 ㈜대산현대모터스를 개업, 오늘에 이른다.

현재 경안지구대 생활안전협의회 부위원장직을 맡아 광주지역에서 활발한 봉사활동도 펼치는 그는 13명의 직원들에게 "손님이 스스로 찾아오게 만들라"는 함축적인 한마디 교육만 강조한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덧 내 나이도 70이 됐다. 현재는 외아들 명훈이(38·부사장)에게 가업으로 물려주려고 회사 경영과 자동차 정비기술을 동시에 가르친다. 나만 잘 살기 위해 남을 짓밟지 않았고, 정직하게 열심히 뛰어서 기술을 인정받아 오늘에 이르렀다. 남은 인생도 그렇게 살 것이다"라고 말하는 김남용 대표의 연륜이 묻어나는 얼굴에서 크고 환한 웃음이 번졌다.

광주=박청교 기자 pcg@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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