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대주는 행위인가.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했던 생각이다. 소설 속 죽은 남편 화장터에서 엄마는 딸에게 속삭인다. 

"아이, 쫌 대줄 것을 그랬어야. 나가 노상 아팠잖애. 내 몸 한나도 워치케 못하겄는디 자꼬 건드려싼게, 나가 하로는 그랬어야. 차라리 딴 디 가서 허고 오씨요."

그러자 아버지는 벽력같이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고 한다. 그가 씩씩거리며 문을 쾅 닫고 나선 뒤 엄마는 오랜만에 달게 잤단다. 한 줌 재가 된 남편 앞에서 비밀스럽게 터져 나온 문장은 그날 밤 단잠이 얼마나 오랜 죄책감으로 남았는지를 보여준다. ‘대줄 걸 그랬다’는 다소 황당하지만 절절한 후회를 이해하려고 기자는 그런 맘이 사랑인지 골몰했다.

그러나 정지아는 과연 사랑을 정의하려고 저 대목을 썼을까. 어쩌면 중요한 부분은 엄마가 한 말 자체가 아니라 작가가 취하는 서술 전략이 아닐까. 엄마는 성행위를 ‘대주는 것’이라고 전제해 타고난 생물학 구조상 남녀 공수가 명확한 게임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제 몸 아픔보다 대주지 못한 미안함이 큰 어머니는 단순히 자기 비하 혹은 희생으로 보이는 차원을 넘어 평생 공을 받아내는 키퍼로 살아온 여성으로서 위치와 의무감을 폭로한다. 그 말을 오직 딸에게만 귓속말로 발설한 사실은 가부장제에 순응한 여성 자의식을 대물림한다는 점에서 심지어 폭력에 가깝다.

중요한 부분은 그 폭력성이 유발하는 충격이다. 엄마 발언에서 모종의 폭력성을 찾아낸 뒤 부정 혹은 이해하려고 시간을 들이는 동안 독자들은 자연스레 청자인 딸 처지에 선다.

노모의 지독한 순응은 오히려 독자들로 하여금 불편한 이물감을 의식하게 만든다. 그러니 ‘더 대줄 걸 그랬다’는 말 앞에 선 독자들이 얻어가는 무언가가 있다면 ‘이런 게 사랑이구나’하는 깨달음보단 기자가 받았던 충격과 멍함과 어떻게든 그 말에서 폭력을 걷어내려 골몰하고 또 실패했던 시간 자체일 테다. 실로 전략이 돋보이는 글쓰기 아닌가.

이와 견줘 지난달 개봉한 영화 ‘바비’는 정반대 전략을 채택한다.

그레타 거윅은 관객을 생각에 잠기게 하지 않는다. 그는 이 영화가 여성 임파워링을 목표한다는 사실부터 ‘우리는 스스로를 잘 몰라서 (가부장제를 빌려) 싸운 거’라는 현상 파악까지 숨기지 않고 친절히 대사로 설명한다. 그 어조는 너무 대놓고 하는 터라 자칫 프로파간다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거윅은 머뭇대지 않는다. 오히려 그 태연함 내지는 뻔뻔함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관객은 무겁게 골몰하고 사무칠 필요가 없다. 떠먹여 주는 ‘빨간 약’을 웃으며 받아 먹으면 된다. 형형한 핑크빛으로 물든 장난감 세계에 실로 어울리는 전략이다. 그 가벼운 서술법은 밉지 않고 산뜻한 뒷맛을 남기며 나름대로 미학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사실 독자이자 관객으로서는 무겁게 사무치든, 가볍게 웃어 넘기든 별 상관이 없다. 사상과 대의의 폭력 앞에 선 여자들 얘기라면 제쳐놓고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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