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 급발진 사고 책임 소재 논란이 새 국면에 접어드는 모양새다. 발단은 지난해 강릉에서 한 할머니가 운전한 차량 사고로 (동승한) 손자가 숨지면서 시작됐다. 당시 할머니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돼 조사를 받았다. 이런 가운데 피해자 측이 국회 게시판에 올린 ‘급발진 의심사고 발생 시 결함 원인 입증 책임 전환 청원’ 글에 국민이 화답하고, 지난주엔 정부가 제동 압력 센서값이 사고기록장치(EDR)에 기록되도록 제도를 개선할 방침으로 알려지면서 입증 책임 전환을 둘러싼 논란이 재점화됐다.

급발진은 운전자가 가속페달을 밟지 않았음에도 갑자기 엔진 RPM이 급증하고 엄청난 속도가 발생하면서 브레이크 페달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제조사는 이런 현상들이 운전자의 졸음 운전이나 페달 또는 기어 조작 실수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대법원 판결도 모두 제조사 편을 들어줬다. 허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국교통안전공단에서 받은 보고서(2010~2022)에 따르면 지난 13년간 급발진으로 의심되는 차량만 766건에 달한다. 하지만 급발진으로 인정된 사례는 하나도 없었다.

이러한 결정이 나온 근거는 자동차에 장착된 EDR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있다. 바로 신뢰성에 관한 문제다. 운전자가 문제를 제기하면 제조사는 EDR을 분리해 자체 분석한다. 제조사 조작, EDR 오류, 기록 저장 방식 등 다양한 가능성이 상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게다가 강릉 급발진 사고는 사건 자체를 새롭게 볼 만한 합리적 의심도 존재한다. 차량이 뒤집히고 벽을 뚫고 나가는 상황에서 ‘어떻게 정신을 잃은 할머니가 가속페달을 100%로 밟은 결과가 나왔는지’가 그것이다. 

그래서 재판부도 피해자 측이 제조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사건의 변론에서 전문 감정인을 선정하고, 그에 맞춰 진행하도록 조치했다. 결국 강릉 사건은 ‘EDR에 대한 신뢰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소송의 성패가 갈릴 전망이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행법상 피해자는 자동차 결함과 손해 간 인과관계를 직접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고도의 기술 집약체인 자동차 결함을 전문 지식이 없는 소비자가 입증토록 하는 건 문제가 있다. 정보의 비대칭성을 해소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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