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뜯지 않은 거대한 레고 상자가 방 한편에 있었다. 지난 5월 산 셀프 어린이날 선물로,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1889)을 구현한 제품이다.

원작을 소유한 뉴욕 현대미술관이 제작에 협력했고, 레고 브릭 개수는 무려 2천316개. 조립설명서도 232쪽에 이른다. 후기를 찾아보니 완성하는 데 최소 7∼8시간쯤 걸린단다. 자고로 지갑을 열기는 쉬워도 마음을 열기는 어려운 법. 차일피일 미루다가 드디어 뚜껑을 열었다.

고흐를 처음 알았던 고등학생 때가 생각난다. 쉬는 시간에 친구 따라 도서관을 갔다. 친구가 고흐 평전을 집어 들기에 물었다. "고흐가 뭐 했더라?", "귀 잘랐잖아." 평전을 넘겨받아 읽어 보니 꽤 마음에 들었다. 그림도 아름다웠지만, 서른일곱에 불과했던 그 짧은 생애가 끌렸다.

그땐 단명한 예술가들이 멋있어 보였다. 서머싯 몸 소설 「인간의 굴레」에도 나온다. "예술가는 사십을 넘어서까지 살아서는 안 돼. 사십 이전에 최고 작품을 내놓기 마련이고, 그 뒤로는 되풀이에 불과하거든."

고흐는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희망을 품고 폴 고갱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고갱은 고흐와 지낸 지 두 달 만에 진절머리를 느끼고 떠나 버린다. 좌절한 고흐는 요양원에 머물면서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지만 얼마 뒤 생을 마감하고, 고갱은 타히티로 떠난다.

기자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 졸업 때까지 캐비닛에 내내 붙여 놨던 엽서는 고갱 그림이었다. 고흐 인생을 통틀어 고갱만 한 악연도, 악역도 없을 테다. 

하지만 그가 타히티에 머물며 쓴 기행문과 그림이 꽤 마음에 들었다. 「인간의 굴레」에도 나온다. "인생에는 아무런 까닭이 없다."

그 기행문에 훗날 서머싯 몸이 서문을 달았다. 그는 고갱을 바탕으로 한 소설 「달과 6펜스」를 집필하기 앞서 타히티를 답사했고, 고갱이 머물렀던 오두막을 찾아냈다.

오두막 문에 고갱이 그린 그림이 있었다. 서머싯 몸은 오두막 주인에게 돈을 쥐어 주고 문짝을 뜯어 왔다. 서머싯 몸 특유의 담백한 문체를 좋아하는데, 서문 마지막 문장은 조금 흥분한 듯 보여 인상 깊다. "지금 고갱은 내 서재에 있다."

오후 무렵 시작한 레고 맞추기가 별이 빛나는 밤을 지나 겨우 끝났다. 새까만 액자부터 시작해 코발트블루 배경, 환하게 일렁이는 별들과 앞으로 쏟아질 듯 도드라진 사이프러스 나무, 이젤 앞에 선 고흐 피규어까지 하나하나 조립하고 나니 손끝이 아렸다.

기념으로 따라해 본다. "지금 고흐(레고)는 내 방에 있다." 

<정양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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