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인천 제물포 해안의 변화와 공간 확장은 1883년 개항 이후 열강에 의해 설정된 조계지와 해안의 공유수면 매립에 의해 주로 이뤄졌다. 특히 일본은 1879년 6월 인천을 개항지로 결정하면서 그 준비를 위해 가장 먼저 상륙해 해안선에 제방을 쌓고 돌과 흙으로 성토해 평탄지를 만들어 선착장, 부두, 도로시설과 택지 조성을 계획했다. 그리고 1882년(12월 24일) 9개 도면을 포함, 총 22쪽으로 구성된 ‘제물포축항목적서(築港目的書)’를 통해 해안 매립을 기획했다. 그 내용은 ‘제물포 재형도(在形圖)’, ‘제물포 시가할지도(市街割之圖)’ 같은 도면을 통해 해안매립지와 그 주변 지역 한인 가옥, 일본영사관과 주변 건물, 상가부지를 표시하고 축항 공사에 소요되는 물품과 장비, 건축재료와 경비를 기록해 제물포 해안선의 변화 이전 상황을 보여 준다.

일본은 이런 준비를 거쳐 1883년 9월 30일 제물포에 일본인 전관조계(專管租界)를 설정하는 ‘조계약서(租界約書)’를 조선과 체결했다. 전문(全文) 10조로 된 ‘조계약서’의 부속 도면(附圖)에 나와 있는 일본인 거류지 그림은 앞서 준비했던 ‘제물포 시가할지도’의 실행이었던 셈이다.

제물포 개항 후 일본, 청국과 각국 조계지가 설정됐지만 점차 인구가 늘어나면서 해결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조계지 앞 해면 매립이었다. 제물포 해안의 본격 매립은 청일전쟁(1894~1895)으로 일본인 거주자가 급격히 증가하면서였다. 청일전쟁 결과 일본 세력이 강화되자 경인철도를 위한 부지 매립이 시작됐고, 이어 1899년 5월 일본조계 앞 해안을 매립했다. 현재 해안동 1가, 2가는 개항 이후 매립으로 인한 해안의 변화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다.

각국 공동조계 앞 해면을 매립한 공간은 해안동 3가, 4가다. 1909년 민간이 매립조합을 조직해 시행했는데, 당시 매립토는 답동(寺町) 언덕에 있었던 일본인 묘지를 율목동으로 이전하고 택지조성공사에서 나온 흙을 사용했다. 앞서 1906년 만석동 해안도 이나다에 의해 매립됐다. 인천역은 현재 올림포스호텔 서쪽 해안을 매립해 경인철도 정차장을 만들었다.

월미도 제방을 따라 일본 제분회사에 연결되는 공간은 지금 개항동(이전 북성동) 1가 일대다. 당시 부영(府營) 어시장인 인천수산회사의 이전지이고, 일본 시모노세키 어업가인 주식회사 임겸(林兼)상점의 제빙·냉장고 건설지로 1929~1931년에 걸쳐 준공된 매립지다. 일본은 이미 러일전쟁 때 월미도 석탄창고와 인천역을 연결하는 군용철도 부설을 위해 목교를 설치했고, 1918년에는 축항설비 일환으로 폭 6m, 길이 약 1천m의 콘크리트 제방도로를 건설하고 월미도 일대를 유원지로 개발했다.

현재 항동 6가와 사동 일대는 1904~1905년에 걸쳐 해안이 매립됐다. 이 시기 조선인 마을 앞 지금의 사동과 신포동 일대 탁포 해변도 매립되는데, 이 지역을 축지정(築地町)이라 불렀다. 1905년 인천항 앞바다 매립 문제가 대두됐지만 매립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생겨 지금 신생동 일부와 신흥동 2가 지역, 가등정미소와 일대 정미소 지역은 1914년 매립이 완료됐다.

항동 1가의 인천 세관지역도 항동 3가~7가에 이르는 공간 매립과 함께 1907~1909년에 걸쳐 세관 내 각 청사와 가건물 창고, 부두, 철도 선로를 설치하는 매립 작업이 완료됐다. 항동 7가 제1선거(船渠)도 매립됐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이뤄진 해안 매립은 384만여㎡에 달했으며 항동 1가~7가, 해안동, 사동, 신포동, 신생동 일대 새로운 토지가 만들어지고 해안선이 직선화됐다.

제물포 매립을 통한 공간 확장과 변화는 해양도시 인천의 근간을 보여 주는 역사적 근거다. 중구 개항장이 다양한 콘텐츠를 지닌 차별화된 역사문화지대라는 사실을 제물포 해안선의 변화 속에서도 재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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