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시인 오스카 와일드는 "이 세상에는 단지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얻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원하는 것이 ‘없어도’ 비극이고, 원하는 것을 이미 가지고 ‘있어도’ 비극이라니요? ‘없으면’ 가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눈이 멀게 되고, ‘있으면’ 더 가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눈이 가려져 비극이라는 말은 아닐까요. 이 해석대로라면 바로 나의 ‘탐욕’이 비극의 씨앗인 셈입니다. 

‘탐욕’이라는 낱말은 대개 부정적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탐욕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하면 듣는 즉시 불쾌해집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기 자신을 탐욕스럽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내가 탐욕스럽다는 것을 알아차릴 쉬운 방법은 없을까요? 그것을 알 수 있는 글이 「나는 너다」(정채봉)에 나옵니다. 저자는 탐욕을 ‘더 좀’ 병이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은 쉬운 글로 탐욕을 설명합니다.

"성년이 된 그에겐 소박한 꿈이 있다. 그건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결혼을 했다. 이내 아기가 생겼다. 그는 처자식을 가졌으므로 집이 있어야 했다. 간신히 집을 장만했다. 집이 있다 보니 이번에는 남들처럼 가족이 함께 탈 차가 필요했다. 드디어 차를 샀다. 차를 사서 움직이다 보니 돈이 ‘더 좀’ 있어야 했다. 그때부터 그는 ‘더 좀’을 연발했다. 집을 ‘더 좀’ 넓히고, 차를 ‘더 좀’ 큰 것으로 바꾸고, 품위 유지가 ‘더 좀’ 필요하고, ‘더 좀’ 때문에 바깥일이 바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안일에는 ‘더 좀’ 무관심해졌다. 나중엔 숫제 하숙하는 사람과도 같았다. 간혹 불평하는 가족에게 이렇게 말했다. ‘더 좀 잘살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니 참아라.’ ‘더 좀, 더 좀’ 하다 보니 나중엔 빚을 얻어야 했다. ‘더 좀’ 폼 잡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더 좀’이 견디다 못해 폭발하고 말았다. 부도가 난 거다. 파도는 사정없이 달려와서 그의 가정까지도 무너뜨렸다. 그는 빈터의 주춧돌 위에서 생각해 봤다. ‘내가 왜 ‘더 좀’ 병에 걸렸었지? 부자, 품위, 차, 집하고 관계가 있지. 그런데 그게 처음 목표인 행복한 가정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는데.’"

저자의 설명처럼 내가 지금 집착하는 것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혹시 ‘더 좀’에 집착하는 건 아닌지, 그것 때문에 오히려 삶의 목표인 ‘행복한 가정’이 파괴되는 건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도 지혜인 듯싶습니다.

「내 인생에 힘이 되어 준 한마디」(정호승)에서 저자는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모든 것을 가지려 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이렇게 글을 이어갑니다. "목숨이 하나라고 둘을 지닐 수 없고, 아내가 하나고 남편이 하나라고 둘을 지닐 수 없다. 둘을 지니면 그 하나마저 잃게 된다. (…) 장자도 ‘바르게 살아가려면 한 발자국 앞에서 멎는 게 옳다’고 했다. 욕심을 다 채우려 하지 말고 약간 모자라고 아쉬운 듯한 상태에서 멈추는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뜻이다. 딱 한 발 더 내디딤으로써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마는 게 우리 삶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대로 ‘있어도’ 비극이고 ‘없어도’ 비극이라면, 그리고 그 비극의 씨앗이 나의 탐욕이라는 이치를 깨닫기만 한다면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분명해집니다.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올라오는 ‘더 좀’ 병이라는 탐욕을 통제하는 겁니다. 그래야 지금 이 순간 내가 이미 가진 것을 즐길 수가 있고, 비록 아직 가지지 못했다고 해도 순간순간을 즐겁게 살아가며 가지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한 노력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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