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법학박사
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법학박사

역사를 논함에 있어서 ‘가설(假設)’은 없다지만, "만일 해방 이후에 우리 민족이 강대국의 신탁통치안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현실화됐다면 남북한 분단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을 표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1945년 12월 16~25일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 3개국이 제2차 세계대전 전후(戰後) 문제 처리를 위해 소집한 외상(外相) 회의를 통상 ‘모스크바3상회의’라고 일컫는데, 이 회의에서 한국에 임시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미·영·중·소에 의한 최장 5년간의 한반도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방안이 채택됐다. 이후 찬탁운동과 반탁운동이 벌어졌는데, 반탁운동은 주로 우익 주도 아래 진행됐고, 좌익은 반탁운동에 동조하다가 찬탁운동으로 변경하면서 좌우 대립이 격화됐다. 

그 와중에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됐는데, 반탁 쪽인 우익을 협의 대상에 포함시키자는 미국 주장과 반탁 쪽의 정당·단체와는 협의할 수 없다는 소련 주장이 맞서면서 결렬됐다. 그리고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렸지만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려는 미·소의 견해차로 인해 결렬됐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채택한 ‘신탁통치안’은 구체성이 없는 미소의 동상이몽일 뿐이어서 애초부터 실현 가능성이 희박했다는 평가가 유력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1948년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 전쟁 발발, 휴전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고서도 75년이나 지난 지금껏 언제라도 불꽃이 튈지 모르는 전쟁 재발의 위험 속에서 늘 맘 졸이며 살아가는 우리 겨레를 생각해 보면 "만일 그 당시에 ……했더라면" 하는 허접한 몽상을 하게 되는 심정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해된다. 

아무튼 미소 간 헤게모니 다툼과 냉전 체제 속에서 한반도에서 단일 정부 수립의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1948년 8월엔 친미 쪽의 남한 정부가 수립됐고, 9월엔 친소 쪽인 북한 정부가 수립됐다. 그리고 올 8월 15일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았는데,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두고 엇갈린 평가가 나온다. 여당에서는 대체로 "독립정신에 기반한 자유와 연대를 강조해 의미 있다"고 평가했지만 야당에서는 시대착오적이고 최악이라며 비난했고, 일부 여당 의원들마저 비판적 태도를 내보였다. 

비판의 요점들은 경축사에 광복에 이른 과거사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 식민지배로 우리 민족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 준 데 대해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일본을 ‘파트너’로 지칭한 점, 민주화·인권을 위해 노력해 온 사람들을 ‘공산 전체주의 세력·반국가세력’인 양 몰아세운 점, 격화되는 국제 정세 속에서 한국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외교적 편향성 우려, 건국절 논란에 대한 불명확한 유보적 태도 따위다.

마지막 항목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윤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우리 독립운동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와 인권, 법치가 존중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운동"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대한 언론의 태도는 ‘(이명박 정부 시절 시발된) 건국절 논쟁 회피’로 받아들이는 쪽과 ‘건국절 주장과 일치하거나 유사’하다고 받아들이는 쪽으로 나뉜다. 사견으로는, 외견상 건국절 논쟁을 회피하려고 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건국절 주장과 일치하거나 유사’하다고 이해된다. 왜냐하면 독립운동을 ‘건국을 위한 준비활동’으로 보는 건 건국이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1948년에 비로소 이뤄진 것’으로 이해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1948년 건국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논증하고 주장했듯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 헌법 규정에도 배치된다. 1948년 공포한 제헌헌법은 전문에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했고, 현행 헌법인 1987년에 개정한 제6공화국 헌법은 전문에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했다고 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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