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 경험이지만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은 장면이 있다. 

중년 여성과 공무원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의 실랑이. 여성은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는 듯했고, 반대쪽 사람 역시 자신들의 처지와 법 집행의 당위성을 단호하면서도 간곡하게 이야기하는 듯 보였다.

그들의 행동과 대화를 아주 짧은 순간에 보고 들었지만, 무엇 때문에 그 사람들이 음식점 앞에서 절절히 이야기하는지 충분히 알 만했다. 

음식점 주인인 중년 여성은 경기 불황 때문에 매출이 줄어 죽을 지경인데 고작 가게 앞에 게시한 음식점 홍보용 펼침막을 왜 철거하느냐고 따지는 상황이었고, 공무원들은 법에서 허용하지 않는 장소에 펼침막 게시는 불법이므로 당연히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내건 펼침막이 불법이므로 철거해야 한다는 공무원과 자신과 가족의 생존권을 위해 가게 앞에 펼침막조차 걸지 못하냐고 항변하는 주인의 쉰 목소리는 그야말로 애달팠다. 그래서인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순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민들은 생존권을 위해서라도 펼침막을 아무 데가 내걸지 못한다. 

그런데 최근 옥외광고물법에 이상한 조항이 생겼다. 국회의원을 비롯해 일정한 요건에 해당하는 정치인들은 펼침막 지정 게시대가 아닌 곳에라도 정치 펼침막을 게시하도록 법을 개정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란 말인가.

대한민국 헌법 제11조를 보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신분에 따라 정치·경제·사회·문화 생활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적시했다.

그러나 아등바등 먹고살려고 서민들이 게시하는 홍보용 펼침막은 지정 게시대에만 걸도록 하고, 볼썽사나운 정당 펼침막은 사람 눈에 가장 잘 띄는 목 좋은 곳에 게시하도록 한 옥외광고물법은 누구를 위한 법인지 되묻지 않을 도리가 없다.

법 독소 조항으로 인한 현실은 더 꼴불견이다. 정당 펼침막 내용은 하나같이 네 편, 내 편으로 갈라 상대방 헐뜯기에만 혈안이 된 듯하다. 지정 게시대가 아닌 전봇대 또는 보행자 신호등 기둥에 펼침막을 마구잡이로 걸다 보니 미관을 해침은 물론 안전까지 위협한다. 이쯤 되면 정당 펼침막이 아니라 민폐 펼침막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를 철폐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정치인과 서민 신분은 결코 다르지 않다. 묻고 싶다. 한 번 더 묻고 싶다. 과연 정당 펼침막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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