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테이블, 투명할 정도로 반짝이는 은식기와 크리스털 잔, 먹기 아까울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하게 준비된 만찬까지. 누구라도 이런 곳에 초대받았다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최대한 격식을 갖춰 방문할 테다. 식사 때 나누는 대화는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내용으로, 이후 자신에 대한 좋지 못한 평판이 돌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말이다. 1870년대 부유한 사교계 모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 ‘순수의 시대’는 상류사회 생활상을 다채롭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동명의 원작 소설은 사회 윤리, 관습, 사랑, 결혼을 주요 소재로 해당 시대 속 인간과 여성의 모습을 섬세한 필체로 성찰한다. 원작자인 이디스 워튼은 이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뉴욕 오페라하우스엔 언제나 그렇듯 잘 차려입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특히 박스석에 앉은 귀빈들은 하나같이 그 모습에서 기품이 넘친다. 그러나 이들은 무대 위 오페라에는 관심이 없다. 공연 후 한 사업가의 집에서 열리는 성대한 연회가 이날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이때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이가 등장한다. 결혼 후 유럽으로 떠난 엘렌 백작부인이다. 남편의 가혹행위에 못 이겨 비서의 도움으로 탈출했다는 소문이 도는 엘렌 부인은 어려서부터 유별나다는 평판을 달고 살았다. 때문에 사람들의 입방아에는 그녀가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아니라 비서, 그것도 남자 비서와 함께 뉴욕까지 동행했다는 사실이 관심을 모았다. 

전도유망한 젊은 변호사 뉴랜드도 엘렌을 알았다. 어린 시절 짝사랑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 그는 메이와 결혼을 앞뒀다. 누구보다 아름답고 순수한 메이와 결혼한다는 사실에 뉴랜드는 기뻤지만 때때로 메이의 사고방식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는 의미 없는 인습에 얽매이는 걸 경계했지만 약혼녀 메이는 달랐다. 세상의 눈과 귀, 전통을 중시했다. 반면 엘렌 부인은 자유로웠고 솔직했다. 철저히 규범에 순응하는 메이의 세상이 아닌, 경계가 없는 엘렌의 세계에서 뉴랜드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때는 19세기 후반, 질병보다 추문이 무서운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랜드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려 하지만 두려움에 망설여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에 엘렌 부인은 최대한 덜 상처 주는 방식으로 뉴랜드와의 감정을 정리하고 떠난다. 다른 이의 행복과 그 세계를 지켜 주는 방식으로 마무리 짓는다. 그리고 그녀도 자신 삶에서 외부에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힘을 키우며 살아간다. 

영화 ‘순수의 시대’는 사실 순수와는 거리가 있다. 작품 속 세계는 위선과 이율배반적인 감정으로 가득하다. 유럽과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던 미국이지만 여느 유럽보다 더 격식과 관습을 따지는 곳이 뉴욕의 상류사회였다. 또 교양과 예절의 탈을 쓰고 타인을 비방하고 소외시키는 위선과 폭력이 만연했다. 그런 세상 속에서 뉴랜드가 자유롭고 열정적이며 솔직한 엘렌을 만나 세계의 균열을 경험하고 고뇌하며 갈등을 겪는 게 이 작품의 큰 축을 차지한다. 그러나 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사랑의 삼각관계라는 외양이 아닌 이들을 둘러싼 관습적이고 허위의식이 팽배한 당시 사회상을 꼬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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