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효림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채효림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내가 너로 살아봤냐? 아니잖아, 니가 나로 살아봤냐? 아니잖아." 장기하와 얼굴들이 부른 ‘그건 니 생각이고’란 노래 가사다. 정말 그렇다. 겪어 보지 않으면 상대 처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나 살기도 바쁜 현대사회에서 나보다 더 어려운 약자를 고려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종종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고 내 처지에서 말하거나 행동하는 모습을 발견해 아차 하기도 한다.

약자 어려움을 헤아려 돕고 싶었다. 그래서 학보사에서 대학생 기자로 활동하며 몇 번이고 이동장애인 불편을 다루는 기사를 작성했다. 장애가 있는 당사자들과 함께 캠퍼스를 누비고 1시간 넘게 경험담을 들었다. 기사와 논문을 읽고 장애학과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겪어 보기 전엔 모르는 일이라고, 발목을 다쳐 깁스 생활을 하니 그제야 눈에 들어오지 않던 문제가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다리가 불편하니 10분 남짓한 거리인데도 험난하게 느껴졌다. 첫 번째 난관은 횡단보도에서 마주했다. 고작 중간까지밖에 못 갔는데 남은 신호 시간은 한 자릿수였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바삐 걸었는데도 그랬다. 다리가 온전한 사람을 기준으로 한 보행시간에 맞추기엔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나는 너무 느렸다. 결국 빨간불로 바뀌고 몇 초가 흐르고 나서야 가까스로 횡단보도를 다 건넜다.

서울시 홈페이지에 따르면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 신호 시간은 기본으로 보행 진입시간 ‘7초’에다 횡단보도 ‘1m마다 1초’를 더한다. 어린이나 장애인을 비롯해 교통약자 이동이 많은 장소는 보행 시간을 더 길게 책정한다. 그렇다면 보행 진입시간은 어떤 사람을 기준으로 정할까. 지정한 구역에 살지 않는 약자들은 턱없이 짧은 시간에 쫓겨 위험천만하게 횡단보도를 계속 건너야만 할까.

지하철 역사를 지나는 중에도 위기와 마주했다. 무수한 계단을 오를 자신이 없어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꽤 많아 보이는 사람이 승강기를 기다리기에 타지 못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문득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비장애인이 많아 정작 장애가 있는 이들이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다행히 정원이 차지 않아 무사히 탔지만, 무거운 전동휠체어에 의지하는 경우 엘리베이터를 타기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움의 손길은 또 왜 이리 적게 느껴졌을까. 버스에 탔는데 빈자리가 나지 않을 때, 기다리지 않고 먼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볼 때, 내 그릇이 작은지 못내 야속하게 느꼈다. 생판 모르는 남을 도와줄 의무는 없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고 배우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을 듣지 못한다. 그저 윤리 문제이니 당연히, 마땅히 해야 할 일로 받아들인다. 배려를 왜 해야 하는지 명확한 까닭을 알지 못하니 사람들이 당연히 행동하지 않는 듯싶다.

약자에 대한 배려는 남을 위해 필요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사회 보호를 받던 어린 시절을 거치며 약자의 상황을 겪었고, 앞으로 언제 어디를 다쳐 약자가 될지 모른다. 나이를 먹으면 차츰 신체기관이 약해져 반드시 약자가 된다. 결국 약자를 위한 배려와 개선은 스스로를 위한 셈이다.

약자 삶에 무심했다면 훗날 자신이 약자가 됐을 때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대하게 된다. 내가 바뀌어야 남들이 바뀌고 사회가 변한다. 이 글을 읽은 뒤에도 약자가 겪는 어려움이 그저 남 이야기라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 누구나 마주하게 된다. 남이 아닌 나를 위해서라도 약자가 직면한 어려움에 모두가 주목하고 개선을 촉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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