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이강동

백제시대 지명으로 추정되는 제물포는 인천 바닷가 전면에 자리한다. 지금의 동구 만석동과 중구 북성포, 해안동에 이르는 해안가 지역을 일컫는 지명이다. 인천 선인들이 생활하며 지켜온 조용한 도시였다. 제물포, 월미도, 작약도, 영종도, 강화도 해역으로 외국 함대와 상선들, 어선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을 보며 바닷가 정서를 마음껏 즐기며 생활해 온 바닷가 도시다.

제물포는 대형 선박들이 자유롭게 운항하던 포구였다. 1893년 1월 고종 임금은 만석동 해역에서 모든 선박들은 회선하라는 칙령이 있을 정도로 제물포, 만석포구, 북성포구로 대형 선박들이 정박해 물품들을 싣고 내리는 일에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만석동 해역에서 모든 선박은 회선하라는 칙령은 만석포구에 곡물 등 각종 물품들이 모여 모두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알고 내린 것이었다.

우리가 일본에 포구를 개방한 시기가 있었다. 부산포, 제포, 염포 등을 개방하고 일본인 거주를 허가해 주기도 했다. 1400년 초 부산에는 일본인 3천 명이 거주했다. 물물교환이 활발하게 이뤄질 정도로 일본과 선린 교류가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교류가 끊긴 후 1872년 8월 일본 정부는 교류를 원한다며 하나부사를 특사로 부산에 보낸다. 군함 2척에 군 병력을 가득 싣고 왔다.

교류를 거절 당한 일본에서는 정한론 논의가 더 활발해졌다. 수년간 교류를 원하던 일본은 조선 개혁파들과 교섭을 하고 1876년 한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한다. 일본 정부는 조약 체결에 의해 제물포에 낯선 이름 ‘개항장’ 지정을 한다. 모든 권리는 일본 정부가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부산으로 군함과 병력을 이끌고 왔으며, 임오군란 때 서울시민과 인천시민들에게 죽창 등으로 공격 당하고 겨우 피신해 월미도에서 어선을 탈취해 일본으로 도망했던 일본공사 하나부사다. 또다시 군함과 군 병력을 이끌고 제물포에 상륙한 하나부사를 개항장 총책임자로 임명한다. 

제물포가 개항장으로 지정되자 인천지역 주민대표들과 전국 각 지역 주민대표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1881년 1월 추운 겨울 한성으로 모여 반대 시위를 했다. 제물포 지명을 말살하려는 책동이기도 해서 사대문 안에 개항장 지정을 반대하는 게시문도 붙이며 수천 명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일본 뜻대로 1882년 개항준비단이 인천에 도착하고 1883년 개항식을 거행했다. 무늬만 개항식을 부랴부랴 연 것이다.

개항식이 끝나자 곧바로 상륙한 건 일본군 병력이었다. 시민들은 놀라워하며 동요했다. 시민들과 청국인들은 생명과 재산에 위협이 있을까 걱정하고, 폐업하는 상점들이 늘어났다. 식료품 가격이 폭등하는 등 인천시민들과 청국인의 생활에 불안이 확산됐다.

일본군 상륙을 환영한다며 시민들은 강제로 동원하기도 했다. 인천지역 지명을 일본식 지명으로 변경하려고 조선통감부에 보고하기도 했다. 시민에 대한 일본의 강압과 압박이 거셌다. 

시민 생활에 불편함이 늘어나고 일본에 대한 불만을 성토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인천감리서에서는 일본과 관계 있는 일에는 시민들이 참여하지 말라는 공지를 붙이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치욕감을 갖게 하는 개항장 명칭과 개항로·개항동 지명을 깨끗하게 청산하고 고유 지명 북성동으로 환원시켜 놓아야 한다. 

개항장 반대 이후 인천에는 일본영사관 소속 경찰과 일본헌병대 군사경찰이 있었음에도 개항장을 특별관리구역으로 묶어 대한제국 경위원에 있던 일본 경찰들을 개항장 경찰로 상주시켜 특별지휘를 받는 경찰권을 행사했다.

감리서 소속 한국 경찰과 시민 접근을 막고 비밀스러운 꿍꿍이 수작을 벌이던 개항장은 시민들에게 빛 좋은 개살구였으며 일제의 찌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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