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1876년 일명 강화도조약이라 불리는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면서 부산항 외에 경기·충청·전라·경상·함경 5도 중에서 2개 항을 추가 개항하는 내용으로 협약했다. 그래서 1880년 5월 1일 러시아의 남하를 방지하고 함흥평야 일대의 미곡을 수출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서 원산항을 개항했다. 반면 나머지 한 개 서해안 항구의 개항은 차일피일 늦어졌다. 그 연유는 우리 측 저항도 있었지만 일본이 아직 서해안 개항지에 대한 정확한 해도와 접안시설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인천 개항은 1879년 6월부터 일본에 의해 거론·제시되기 시작한 이래 수차례 회의를 거쳐 급기야 1881년 2월 28일, 20개월 후 인천을 개항하는 것으로 최종 합의했다. 그간 걸림돌로 작용했던 인천항에서의 쌀 수출 문제에 대해 흉년 시 인천항에서 방곡령(防穀令)을 실시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인천은 수도에 아주 가까운 해안의 요충으로 보장중지로 간주했기 때문에 개항 문제에 대해 조선은 처음부터 강경한 거부 자세로 일관했다. 결과적으로 인천은 20개월 후인 1882년 10월 개항이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 수신사로 갔다가 가져온 「조선책략」의 시행과 인천을 개항한다는 정부의 방침은 이내 전국적인 유림(儒林)의 극렬한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인천 개항 반대는 인천 개항이 교섭 중인 1880년 12월부터 이미 반대 상소가 빈번했고, 인천 개항이 확정된 이후인 1881년 3월 25일에는 이만손을 필두로 김홍집을 탄핵하는 영남만인소(萬人疏)가 등장했다. 이른바 신사년(辛巳年)의 위정척사 운동은 개화정책 중단과 특히 인천항 개항을 극력 반대했지만 정부의 극단적 탄압으로 수면 아래로 잠재워졌다.

조선 정부의 개화정책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일본은 1882년 4월 곤도(近藤眞鋤)를 인천 초대 영사에 임명해 인천 개항 준비에 착수했다. 또한 조선은 5월 22일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시작으로 6월 6일 영국, 6월 30일 독일과도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이어 7월 일본은 새롭게 조성될 일본조계 측량을 위해 기사 5명을 인천에 파견했고, 우리 정부는 고영희를 입회해 작업을 감독했다. 측량은 러시아인 사바친이 담당하고, 일본인들은 영사관 부지 선정과 일본 거류지 경계를 정했다.  

그러나 1882년 7월 23일 ‘예견’됐던 구식 군대의 쿠데타가 시작됐다. 이른바 임오군란이다. 군란은 일본공사관 습격으로 이어졌는데, 표면적으로 신식 군인(이른바 별기군)에 대한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해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속내는 집권세력에 대항한 반일운동이었고, 개화 세력과 전통의 위정척사(衛正斤邪) 세력 간 충돌이었다. 배후의 후원자였던 대원군이 다시 정계에 복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임오군란은 또 다른 한편으로 청·일 양국이 조선에 병력을 파견하고 내정에 직접 개입할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청군은 8월 10일, 일본군은 8월 12일 제물포에 입성했다. 군란 이후 교착상태에 빠졌던 정치적 대립은 8월 26일 청군이 대원군을 납치해 청에 압송함으로써 급물결을 탔고, 군란 처리는 8월 30일 오늘날 인천개항박물관 일대에서 ‘제물포조약’을 맺으면서 일단락됐다. 이곳은 당시 화도진의 제물‘진(津)’ 남변포대 일대였다. 제물포라는 지명은 서양인들에게 있어 ‘인천은 몰라도 제물포를 알게 하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제물포조약 이후 일본 정부는 자국 공사관이 습격당한 데 대한 책임을 물어 9월 18일 하나부사(花房) 공사(公使)를 다케조에(竹添)로 교체했는데, 이때부터 10월로 예정됐던 인천 개항 문제가 당면 과제로 부각됐다. 일본 내각의 이노우에(井上馨) 외무경(外務卿)은 조선의 인심이 평온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개항 시기를 늦춰 1883년 3월로 변경하자는 보고서를 일본의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太政官)에 상신하기도 했으나, 개항 시기는 다시 1883년 1월 1일로 앞당기는 것으로 최종 결정됐다. 

이후 제물포 개항을 통해 ‘근대’라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지만 그간의 역사는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140여 년 전 개항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 역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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