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동국대 명예교수
윤명철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동국대 명예교수

1950년 9월 15일 오전 5시. 한국군과 유엔군 총 7만5천 명과 261척의 해군함정이 동원된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됐다. 미군은 월미도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고, 이어 전투를 벌이며 진격했다. 우리 해병대는 9월 28일 드디어 서울 중앙청(없어진 건물) 꼭대기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그리고 낙동강까지 밀려 멸망 직전까지 갔던 대한민국은 반격을 개시했다.

70여 년의 대격동기가 지난 지금 인천상륙작전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아니 ‘6·25’라는 현대사 최대의 대참상을 기억하거나 의미를 두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사람은 좋은 기억이건, 나쁜 기억이건 망각을 잘한다. 집단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인은 그 정도가 조금 더 심한 듯하다. 역사의식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거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탓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참상을 숨기고 싶어하는 세력들이 국내외에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이 강대국 반열에 오르는 이 상황 속에서도 북한, 중국, 소련은 ‘6·25 침략 전쟁’을 사과는커녕 인정한 일조차 없다. 심지어는 남한 내부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거나 또는 희석시키는 경향이 있다.

한 집단이 살아온 공간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지정학적인 운명이 있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은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동했다. 특히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세계 질서의 재편 과정인 ‘Great Game’의 충돌 장소로서 약소국 ‘조선’, 즉 ‘한반도’가 세계 역사에 등장했다. 대륙세력으로서 해양을 향해 거침없이 남진하는 러시아, 이를 막는 해양세력인 영국, 재빠르게 성장한 일본, 오랜 종주국임을 내세운 청나라는 각각 조선을 지배할 목적으로 치열한 갈등을 벌였다. 1차로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그 과정에서 한반도의 세력권을 남북으로 나누자는 주장이 영국에 의해 처음 나왔다.

이어 사할린 등의 영토와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충돌하는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을 각각의 이익선으로 놓고 충돌했다. 특히 만주를 이미 장악한 러시아에게 조선의 지배와 동해 진출은 사활적인 이익이 걸린 문제였다. 결국 1904년 영국과 미국도 간접참여한 러일전쟁이 발발했는데, 이때 러시아는 한반도의 세력권을 남북으로 분할하자는 안을 일본에 제안했다. 결국 러시아는 조선의 점령과 태평양 진출이 실패로 돌아갔고, 대륙국가라는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일본의 승리로 한민족은 식민지로서 긴 세월 고통을 겪었다. 이어 비주체적인 독립 등으로 인해 ‘남북분단’이라는 또 다른 지정학적인 숙명의 멍에가 씌어졌고, 결국은 ‘6·25’라는 ‘New Great game’의 전장으로 전락했다. 다만, 주체가 러시아와 일본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바뀌었고, 청나라에서 ‘중공’으로 변화했을 뿐이다. 일부에서는 ‘6·25’를 국제대전 또는 이데올로기의 대결이라는 점을 과장하면서 전쟁 발발의 책임을 모두에게 돌리거나, 심지어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민주주주의 국가들이 주도한 양 주장하는 ‘한미공모설’까지 제기했다. 

하지만 공개된 모든 자료들을 보면 이 전쟁은 북한과 소련이 주도면밀하게 기획했고, 중국은 동조하다가 대군을 파견했고, 휴전회담에 참여함으로써 통일을 결정적으로 방해했다. 역사적 배경과 그 시대의 세계 질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고려하면 당연한 행위였을 수도 있다.

소련과 중공은 과거 러시아, 청나라와 동일한 구도로써 한반도와는 지정학적인 숙명을 가졌다. 소련 역시 한반도를 교두보 삼아 태평양으로 진출해야 했고, 사할린과 홋카이도 등 영토 분쟁 때문에 일본을 근거리에서 압박해야 했다. 더구나 ‘이데올로기’로 외장한 패권쟁탈전이 미국과 본격화된 상황에서 한반도의 세력권화는 지정학적인 숙명이었다.

중공은 청일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상실(?)한 영토가 있다고 인식하고 일본과는 대결구도를 가졌다. 또 국민당군과 전쟁을 치르면서 민주주의 국가들과 전선을 만들었으므로 적대감을 가졌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역사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만주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립할 필요성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국은 역사적으로, 지정학적으로 한민족 발전과 한반도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지정학적 구도는 동아시아 또는 세계 질서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현재는 주연이 미국과 중국으로, 조연이 러시아와 일본으로 변한 것뿐이다.

2023년 9월 15일 현재 역사학자로서 가정해 본다. 만약 무리하거나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었던 ‘인천상륙작전’이 실패로 끝났다면? 아마도 우리는 이 세계에서 가장 억압받는 전체주의 체제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자식들에게도 그 고통을 유산으로 남겨 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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