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미르 고원의 호수와 구름, 하늘이 장관을 이룬다.
파미르 고원의 호수와 구름, 하늘이 장관을 이룬다.

첫 경험은 잊지 못하는 법이다. 60대가 되니 새로운 뭔가가 별로 없다. 그러나 평소 하지 않던 산악 트레킹을 선택해 보니 생소하고 신기한 일이 많다. 하루하루를 기대와 설렘으로 시작한다.

조르쿨 호수로 가는 길에 파미르 상징이자 희귀종인 마르코 폴로 산양 떼를 봤다. 고봉 산자락을 따라 일렬로 이동하는 장관을 보려고 차를 세웠다. 천적을 피해 고지대에서 서식하는 산양 무리는 아침 산책처럼 여유로운 모습으로 산길을 거닐었다.

그렇게 파미르 하이웨이를 한참 벗어나 그 내부를 들어오니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서늘한 바람과 잡힐 듯한 구름, 여전히 흰 눈을 간직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우리 일행을 홀린다. 멀리 파란 하늘 아래 하얀 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산맥도 보인다.

너무나 한적한 파미르고원 깊숙한 곳. 길은 보이지도 않는데 현지 기사들은 잘도 찾아다닌다. 오가는 차도, 사람도, 흔적도 찾기 힘든 고지대 바람과 그 고즈넉한 풍광 속에 나도 자연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이다.

고원 곳곳에 빙하가 만드는 물길과 수렁길을 가다 모처럼 푸른색 지프차를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진흙탕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였다. 알고 보니 러시아에서 온 젊은 부부가 이렇게 갇혀 이틀 동안 좌절과 절망의 시간을 보내다가 우리를 구세주처럼 만난 셈이었다.

진흙에 빠져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러시아 일행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진흙에 빠져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러시아 일행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4천200m 고원 심장부에서 이틀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차 7대가 모두 멈춰 뒷바퀴가 깊은 수렁에 빠진 지프차 견인에 나섰다. 우리 일행은 각종 비상장비를 갖춘 덕에 어렵지 않게 수렁에서 차를 뺐다.

그렇게 낯선 곳에서 감사 인사를 받고 서로 헤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 일행 중 2호차가 얼마 가지 않아서 수렁에 빠졌다. 앞서 가던 일행이 나와서 차를 당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차로도 견인해 끌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뒷차 승객들도 모두 나와 달라는 요청을 받고 몸을 세웠다.

그런데 자기 갈 길을 가지 않고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러시아 부부 차가 구세주로 나타났다. 뒤에서 당기는 데 실패한 우리 모습을 보더니 앞쪽으로 가서 차체에 부착한 연결고리(윈치)를 2호차에 걸고 조금씩 조금씩 진흙탕에서 빼냈다.

이렇게 빨리 거꾸로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이 차는 우리가 트레킹을 위해 조르쿨 호수에 주차하는 지점까지 따라와 주고 돌아갔다. 간호학을 전공한 김모 교수는 ‘파미르의 결초보은’이라고 했다.

채 대표는 "우리가 구해 준 러시아 지프는 하늘이 보낸 천사"라며 감사해 했다. 치과의사 조 원장은 "이런 게 파미르"라고 한마디 보탰다. 남부 파미르에서 보낸 잊지 못할 추억을 뒤로하고 일행은 이제 무르캅으로 이동했다.

무르캅은 유목민이 많은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 사는 곳이다. 국경선을 긋기 전에는 키르기스스탄이었지만 인간이 만든 인공의 경계선 때문에 졸지에 타지키스탄 소속이 됐다.

트레킹 시작 일주일이 지나자 서로의 얼굴에 익숙해졌다. 모처럼 여유롭게 식사한 뒤 자연스럽게 대화 자리가 이어졌다. 잘도 걷는 최고령 권 선생에게 "여기에 간다고 했을 때 부인이 말리지 않으셨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내가 집에 없으면 나도 좋고 자기도 좋고…. 어디 가든 상관 안 합니다. 파미르 게스트하우스에 빈대나 벼룩이 나올지 모른다고 하니 집에 오기 전에 사우나 가서 싹 씻고 옷은 모두 버리고 오라네요."

웃음이 많은 권 선생은 집에 있어도 가끔 부부싸움하면 평창 선수촌에 분양받은 집으로 혼자 나가거나 문경 고향집에 간다고 했다. 정 안 되면 티엔씨여행사에 문의해 해외 일정으로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무르캅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달콤한 휴식시간을 가졌다.
무르캅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달콤한 휴식시간을 가졌다.

"친구들이 내가 파미르에 있다고 하니 ‘니 미쳤나? 빨리 돌아오라’고 하네요."

70대 권 선생은 주위 친구들은 파미르는 상상도 못하지만 자기는 다행히 아직 잘 걷는다고 했다. 또 다른 70대 박 선생과 공통점은 성격이 원만하고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는 사실. 주변에 양보하고 잘 베푸는가 하면 나이가 들면서도 사랑받는 모습을 실천하는 중이었다.

이튿날 파미르 호텔 아침 식사 자리에서 EBS 테마기행 ‘중앙아시아’편에 나오던 이해식 부부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10년 만에 환갑 기념 투어를 한다는 이 선생은 타지키스탄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학교 외국어가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변했습니다. 국가 교육정책이 바뀌었다는 얘기지요. 이제 파미르 유목민조차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낯선 풍경이 일상이 됐습니다. 전에는 외국인들을 두려워하면서도 따뜻한 친절을 베풀었는데, 이제 많이 달라진 듯싶어요."

오늘은 무르캅에서 카라쿨 호수로 이동하는 날. 최고 높이 4천655m 아크 바이탈 패스를 지나 고지대 유목민들의 숙소인 요르츠에서 머물게 된다. 우리가 지나는 최고봉 아크 바이탈 패스에서 박 교장 돌발 행동은 다음 편에서….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