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시절을 그릴 때에는 다시 못 올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담아 아름답게 회상하는 게 일반적이다. 특히나 그것이 한 편의 찬가라면 말이다. 2016년 영화 ‘라라랜드’로 많은 사랑을 받은 데미언 셔젤 감독은 2022년 할리우드에 헌사하는 작품 ‘바빌론’을 내놓았다. 하지만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바빌론이 어떤 곳인가, 고대 로마에 앞선 최초의 국제도시이자 탐욕과 죄악이 넘쳐나던 악의 소굴이 아니던가! 이는 꿈과 희망을 파는, 세상에서 가장 마법 같은 도시인 할리우드와는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다. 그러나 셔젤 감독은 초기 할리우드가 산업 토대를 닦던 1920년대, LA의 브레이크 없는 성장과 그 속에서 피어나던 광기와 혼란의 역사에 주목했다. 정신없이 어지럽고 천박함이 퍼덕이는 할리우드. 품위, 아름다움, 고상함과는 한참 거리가 먼 거칠고 종잡을 수 없는 곳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사랑한다는 감독의 고백을 담은 작품이 바로 ‘바빌론’이다.

때는 무성영화의 인기가 절정을 구가하던 1926년, 한 영화 제작자의 대저택에서 호화로운 광란의 파티가 열렸다. 수많은 인파로 꽉 찬 그곳에 허드렛일을 하는 매니와 배우 지망생 넬리도 있었다. 무일푼에 경력도 전무한 처지였지만 배포와 자신감만큼은 이미 스타 반열에 올라 있던 넬리는 영화 관계자 눈에 들어 단역에 캐스팅된다. 비중이 큰 역할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야성적이고 도발적인 매력으로 단박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성공한다. 매니 역시 당대 스타 배우 잭의 환심을 사 연출 스태프로 할리우드에 입성한다. 

당시가 무성영화 전성시대라고 하지만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스타 배우들은 약물에 취하는 일이 일상인 데 반해 한쪽에선 임금 체불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개됐다. 촬영 현장에 카메라가 없는 일도 속출했다. 그 뿐만 아니라 안전장치 미비로 제작 중 다치거나 심지어 사망하는 일까지 심심찮게 발생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잭, 매니, 넬리는 물 만난 고기처럼 상승기류를 타고 전성기를 향해 힘차게 나아갔다. 그러나 그 시간은 뜻밖에도 매우 짧았다. 1927년 사운드 영화 ‘재즈 싱어’의 등장은 유성영화 시대를 알리며 빠르게 무성영화 제작 방식과 작별을 고했다. 

지각변동을 맞이한 시기에 너나 할 것 없이 새 시스템에 적응하고자 노력했지만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 있지 않았다.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꿈과 열정을 품고 활동하던 세 사람의 내리막길도 빠르게 펼쳐졌다. 대스타 잭은 아래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그간 눈여겨보지 않았던 수많은 스태프들의 노고를 알게 된다. 우정인지 사랑인지 모를 감정을 키워 가던 매니와 넬리도 변화에 적응하고자 애쓰지만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 

‘바빌론’은 할리우드 대격변기로 꼽히는 1920~1950년대를 배경으로 영화에 인생을 건 다채로운 인간군상을 그린 작품이다. 성공과 실패가 한데 맞물려 롤러코스터처럼 등락을 오가는 혼란의 할리우드. 성공을 향한 욕망과 열정의 크기에 비례해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지는 잊혀짐의 비극 또한 이 작품은 말한다. 다만, 화법이 이전과 달리 과격하고 선정적이며 다소 장황해 호불호가 갈릴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셔젤 감독은 자신만의 언어로 영화에 대한 최대의 존경과 사랑을 전한다. 비록 그 130년의 역사가 언제나 아름답지만은 않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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