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9월에만 여행을 세 번 다녀왔다. 모두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었지만 짧은 일정 탓에 아쉬움이 남았다. 갈증을 해소하고 싶어 연휴 동안 지독한 여로형 소설을 연달아 읽었다.

그 중 하나가 잭 케루악이 쓴 「길 위에서」(1957)였다. 그 시절 미국 청년문화를 주도한 ‘비트세대’ 교과서 같은 책이다. 기성세대에 저항해 방랑에 나섰던 비트족들은 이후 히피문화의 도화선이 됐다.

주인공 ‘샐 파라다이스’와 ‘딘 모리아티’가 그들 친구나 애인과 함께 미 대륙을 횡단한다. 뉴욕에서 출발해 샌프란시스코로, 다시 동부로, 다시 서부로…. 그들 표현을 빌리자면 ‘너절한 여행’이자 ‘고귀한 움직임’이다.

기승전결 없이 그들이 질주하는 대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느슨한 서사 구조 틈마다 재즈 이야기가 귀를 터질 듯 메운다. 그렇다고 그 여정에 함께하고픈 마음이 들진 않았다. 외려 저래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걱정스러웠다. 익숙지 않은 미국 지도를 펼쳐 놓고 ‘밤엔 안 춥나, 돈 떨어졌을 텐데’ 따위 걱정을 하면서 그들 행적을 초조하게 뒤쫓다가 어느 구절에서 눈이 멈췄다.

"신에게는 양심의 가책이 없다…. 이 모든 일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기 힘들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도 아니고 ‘무심하시지’도 아닌 ‘양심의 가책이 없다’! 이 명제를 빌미로 삼아 앞날에 대한 책임감을 조금 내려놓았을까? 그들은 거리낌 없이 말하고, 움직이고, 파산하고, 잠깐 일하고, 머물다가 다시 떠났다. 진정한 복음은 신이 인간에 허락한 자유의지이며 처음부터 현재와 미래 사이에 시차 따윈 없었다는 듯.

반면 나는 다가오지 않은 날들을 그저 ‘언젠가’로 상정해 두고 최대한 멀찍이서 바라본 듯싶다. 울타리를 쳤다. 무엇이든 좋아 보이는 일이라면 그 안으로 던져 놓고 보며 저축한 셈 쳤으나 실은 미루기였다.

‘게으른 완벽주의’보다 ‘부지런한 대충주의’가 낫다. 무작정 떠나 길을 잃고 다시 찾아내며 길 위에 마음을 한 방울씩 떨어뜨린 비트족들도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그토록 열광했던 재즈처럼 살았다. 이따금 그럴듯해 보이는 소절이 들리면 잠깐 음미하고, 또다시 몸을 꼬고 불어 젖히면서 삶을 끊임없이 연주했다.

"정말 멋진 날들이었다. 아무런 꿈도 없었기에 내 앞으로 세계가 활짝 열렸다." 요는 움직임의 가능성을 멈추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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