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로마 고유의 신(神) ‘야누스’는 출입문의 수호신으로, 머리 앞뒤에 얼굴이 있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의 의미를 후세 사람들은 다양하게 해석하는데, 그 중 하나는 ‘시간’ 개념으로 해석해 ‘과거’와 ‘미래’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난날에 너무 매달려서도 안 되고, 동시에 너무 앞만 보고 달려서도 안 된다는 지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한쪽에만 매몰되지 말고 앞뒤를 살펴 균형적인 삶을 살라는 뜻이지요.

삶은 ‘나’와 ‘너’와의 관계 속에서 영글어 갑니다. 그런데 야누스 신화에서 알듯이 앞만 보고 달리는 ‘나’와 뒤를 돌아보는 ‘나’, 이렇게 두 개의 ‘나’가 만들어 가는 과정이 개인의 삶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앞을 보는 게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뜻이라면, 뒤를 돌아보는 것은 ‘과거’에 매몰된 채로 현재를 산다는 뜻입니다. 아픈 과거에 사로잡혀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할까요? 그러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늘 과거와 미래라고 하는 양쪽 모두에서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결정하고, 현재의 내가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불안해하고 자신의 과거 실수를 후회하고 원망하며 살지만, 행복한 사람은 밝은 미래에 대해 설레며 실패를 딛고 일어선 과거에 대해 오히려 자부심도 큽니다. 그렇다면 ‘설렘’과 ‘자부심’은 언제 느낄까요? 바로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불행과 행복은 ‘현재’의 나, 즉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현재의 내가 행복하다면 과거의 실수조차도 자부심으로 해석될 테고, 미래 역시도 설레며 기다려지기 때문입니다.

두 아들을 둔 어느 가난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마음을 가꾸어 주는 작은 이야기」(이도환)에 나옵니다.

두 아들은 힘겹게 일하는 아빠를 돕기 위해 함께 다녀야 했기에 늘 운동화가 빨리 닳곤 했습니다. 어느 날 중고 세탁기를 장만하기로 한 아빠는 신문광고란을 뒤져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은 훌륭한 저택이었습니다. 주인 부부는 고맙게도 아주 싼값에 팔았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아빠는 무심코 아들의 운동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두 녀석 모두 신발이 다 떨어졌다며 새 운동화를 사 달라고 난리예요. 새것을 사 주긴 해야 할 텐데 참 걱정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방 안으로 급히 뛰어들어 갔습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빠에게 남편이 미안하다고 하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은 아이들 신발 때문에 걱정하셨죠? 우리에겐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는 태어난 후 아직 한 번도 걸음을 옮긴 적이 없지요. 몸이 아파서요. 만약 우리 아이가 신발을 신고 걸어 다녀서 단 한 켤레만이라도 닳아 못 신게 된다면, 우리에겐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아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니 이해 바랍니다."

집에 돌아온 후 아이들의 낡은 운동화를 봤습니다. 고민 덩어리로만 여겨지던 그 신발들이 그렇게 사랑스럽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 글 속의 가난한 가장은 걷지 못하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낡은 운동화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았습니다. 아들이 건강하다는 사실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요? 비록 어렵기는 해도 아직 일자리가 있다는 것, 그래서 아이들 입에 풀칠이라도 해 주니 말입니다.

이미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현재’의 태도가 미소와 성실함으로 일을 대하게 하고, 더 나은 일자리를 얻는 계기가 돼 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픈 지금의 현실도 훗날에는 큰 자부심으로 느껴질 겁니다. 아팠던 과거를 찬란한 과거로 만드는 비결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이미 가진 것에 감사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태도고, 이 태도가 밝은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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