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5주년이 되는 해다. 은혼식이라고 하는데, 보통 결혼기념일보다 더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는 부부로 함께한 시간이 더 많아지는 기준점이 되기 때문이다(요즘같이 결혼 정년이 늦어지는 상황에는 맞지 않겠지만). 몇 년간 특별한 이벤트도 없고 반복된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으려고 기념을 맞아 큰맘 먹고 동남아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당초 여행 취지를 생각해 부부 둘만 계획했으나, 비행기를 타고 떠난다는 이야기를 엿들은 아이들이 동참을 선언하는 바람에 가족여행이 됐다.

공항 게이트 앞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탑승하라는 안내에 아내는 얼른 가서 줄을 서자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기자는 어차피 다 탑승한 뒤에 천천히 가서 자리에 앉아도 되는데 왜 다리 아프게 줄을 서서 기다리냐고 천천히 가자는 제안을 했다.

생각해 보니 이런 상황이 25년 전에도 똑같이 벌어졌다. 신혼여행 당시 게이트 앞에 줄을 서서 빨리 들어가자던 아내와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기다리다 천천히 들어가도 된다던 남편.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라니 사람은 참 변하지 않는가 보다.

이번 가족여행은 패키지여행의 강행군과 처음 보는 이들과 동행, 추가 옵션과 쇼핑 바가지요금이 싫었기에 자유여행을 계획했다. 숙소부터 스마트폰 앱으로 예약하고, 1시간 이내 가까운 거리는 그랩(Grab)이라는 한국 카카오택시 같은 앱을 설치해 이동했다. 현지 화폐가 부족한 경우 출금이 가능한 수수료 없는 카드도 만들었다.

50이 넘은 부부만 떠났으면 생각지도 못했겠지만 성인이 된 아이들이 이런 정보를 알아서 척척 준비한 덕에 자유여행 준비가 한결 수월했다.

영어 단어와 한국말에다 손짓·발짓 섞어 가며 현지인과 대화하는 부부 모습과 각종 돌발 변수에 빠른 대처를 하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본 아이들은 엄마·아빠가 뭐든지 다 잘하는 존재에서 나이 든 평범한 중년 부부로 보인다며 세월의 흐름을 안타깝게 여겼다.

부모 처지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다녔던 과거 여행에서 이제는 구글맵으로 거리와 시간, 동선을 계산하고 자연스러운 영어로 외국인들과 소통하며 농담까지 하는 자녀에게 이끌려 다니는 처지가 됐다.

이래서 세대교체가 필요하겠다는 씁쓸한 생각을 하면서도 25년간 우리 부부 결혼생활의 증표인 아이들을 건강한 성인으로 잘 키웠다는 보람과 성취감도 크게 다가왔다. 

여행은 잘 마무리했다. 패키지여행보다 한껏 자유스럽고 넉넉한 시간에 우리가 하고 싶은 체험만 골라 했고 비용도 많이 아꼈다.

코로나19 이후 오랜만에 이국 정취를 느끼며 성인이 된 자녀들과 술 한잔 기울이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며 신혼여행과는 또 다른 가족애를 느끼는 25주년 기념 행복한 가족여행이었다. 재충전했으니 다시 신발끈을 동여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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