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현린 주필
원현린 주필

올해는 단기 4356년이다. 개천절을 맞아 강화도(江華島) 참성단(塹星壇)에 올랐다. 그곳에는 여전히 국조(國祖)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하늘에 우리 민족의 국시(國是), 홍익인간(弘益人間)이 구현되는 세상을 축원하는 제를 올리는 듯했다. 돌아오는 길에 전등사가 있는 정족산성(鼎足山城)도 둘러봤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해 삼랑성(三郞城)이라고도 부른다. 선원사에서 들려오는 호국불교의 상징 팔만대장경 조판 소리, 항몽(抗蒙) 기치를 내걸고 투쟁했던 삼별초 김통정(金通精)장군도 만나 본다. 최씨 무단정권(武斷政權) 하에서도 시금주(詩琴酒)를 즐긴 삼혹선생(三酷先生) 이규보(李奎報)의 술잔과 시 읊는 소리도 빼놓을 수 없는 강도 기행 맛이다.

필자 지인 중 강화 나들길 길잡이가 있어 자주 걷곤 한다. 강화해협을 건널 때마다 역사상 숱하게 치러진 강화도 전장(戰場)의 참상이 떠오르곤 한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도서지방 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사방팔방에서 불어오는 해풍은 그야말로 맛있다. 바람값 비용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면도 있지만 뭍의 풍광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각종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인용, 강화도의 어제와 오늘을 약술해 본다. 강화에 가면 까마득한 날의 유적, 선사시대 고인돌이 있다. 고려조 당시 몽골 침략에 맞서 싸우느라 임시 천도(遷都)했던 39년간의 강도(江都)시대도 경험하게 된다. 고려 고종 18년 1231년 공물을 요구하는 몽골의 사신 저고여(著古與)와 사신단이 살해된 사건을 구실로 몽골이 고려를 침입했다. 당시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崔瑀)는 개경에 있던 도읍을 강화로 옮기고 결사항전에 들어갔다. 1270년까지 39년간 6차에 걸쳐 고려를 공격했으나 강화까지는 침탈하지 못했다. 몽골과의 전쟁은 원종 11년인 1270년 강화도의 궁궐과 성곽, 군사기지를 모두 부술 것을 내세우는 몽골의 화친 조건을 수락하면서 끝이 났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강화 전쟁사는 이어졌다. 1866년(고종 3년) 천주교를 탄압했다는 구실로 프랑스 극동사령관 로즈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와 문화재를 약탈하고 파괴하는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또 한번 강화도는 전쟁터가 됐다. 그나마 남았던 역사유적들이 사라졌다.

강화의 전란(戰亂)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871년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 침몰사건(General Sherman Incident)의 책임과 통상 교섭을 명분으로 미국이 조선을 침공,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했다. 미국이 군함을 보내 강화도를 공격해 양측 피해가 컸다. 교전 결과 조선은 광성보가 함락되고 어재연(魚在淵)장군을 비롯한 상당수 병력이 손실을 입었다. 미군은 통상을 요구하며 20일간 주둔했으나 조선의 완강한 쇄국 정책으로 아무런 협상을 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미국과의 최초 전투이자 마지막 싸움이었다. 

조선은 병인·신미 두 양요를 계기로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 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의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며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불과 신미양요 4년 후인 1875년 일본 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하는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 당시 조선은 제대로 항전도 못하고 굴복, 이듬해인 1876년 불평등하지만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또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으로도 불리는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을 체결해야 했다. 조선 조정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어두워 서세동점(西勢東漸) 기미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몽고군의 침략 당시 화친 조건으로 우리 손으로 궁궐과 성곽 군사시설을 허물고, 프랑스 군대가 외규장각 도서와 보물들을 불태우고 침탈해 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조정과 강화 백성들이었다. 

강화 마니산을 오르고 나들길을 걸으며 역사를 회고하다 보니 떠오르는 상념은 영광보다는 온통 지나간 아픈 역사, 통사(痛史)뿐이었다. 심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무능한 정치가 산자수려(山紫水麗)한 강토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아녀자들을 지켜내지도 못했다. 첫 번째 화살은 맞을지언정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말라 했다. 누차에 걸친 화살을 맞고도 여전히 정신차리지 못하는 우리 정치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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