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연수구 한 대창구이 집. 익어 가는 돼지껍데기 너머로 맞은편에 앉은 선배 목에 벌겋게 핏대가 섰다. 이내 언성이 높아지고 침이 튄다. 옆에 앉은 부장은 선배 말을 가로막으며 침 튀기기에 동참한다.

지난 주말 벌어진 무신론자와 기독교 신자 간 토론이다. 무교인 선배가 "자기 존잴 믿어야만 천국에 보내 준단 신의 논리는 도덕상 옳지 않다"는 취지로 서문을 열었다. 신실한 교인인 부장은 "믿음 없는 자를 왜 천국에 보내야 하느냐"는 반박으로 시작해 "신은 왜 무조건 도덕상 옳아야 하느냐"는 지점까지 나아갔다.

튄 침방울을 맞으며 기자는 사뭇 다른 생각으로 막걸리를 홀짝였다. 그보다 종교란 애초 무얼까. 종교가 가진 순기능과 유용함이 있다면 바로 세계를 바라보는 특정 시각을 만들어 내고 공유하는 점이 아닐까.

무얼 믿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지를 고민한 사람들이 종교라는 힘 아래 공동체로 묶인다. 같은 가치를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존재를 긍정하는 세계관을 공유하고 살아갈 힘을 다진다. 말하자면 종교는 사람을 살게 한다. 종교가 지닌 힘과 구실을 부정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다시 궁금해진다. 이 같은 순기능을 다한다면 이단도 괜찮을까? 이단을 믿는 부모님한테 태어나 모태신앙과 무신론 사이에서 오래 방황하던 친구가 떠올랐다. 그는 부모님이 선하고 소박한 분들이라 더 혼란스러워했다.

기자는 친구가 이단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네 종교는 네가 스스로 선택하라"고 조언했으나, "일반 교회와 이단이 뭐가 다르냐"는 물음엔 명확하게 답하지 못했다.

우린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이단과 정통을 나눠서 정의할까. 늦게나마 그 답을 더듬어 보자면 이단은 산 인간을 추앙해 문제다. 이단은 재림예수를 표방한 교주를 숭배하며 왜곡된 세계관을 설파·공유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탐욕과 성욕을 지닌 인간이 신의 자리에 서니 이단은 자연스레 교인들의 금전과 성을 착취하는 ‘믿음 장사’ 형태로 귀결하기 쉽다.

무엇보다 그릇된 신념을 퍼트리는 일은 모든 거짓말과 사기가 그렇듯 인간에 대한 신뢰 전반을 무너뜨리고 사회를 병들게 한다. 그러니 신은 재림해선 안 된다. 진리는 눈에 보이거나 만져질 때보다 스스로 내면에서 발견할 때 더 빛나고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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