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이선신 한국법치진흥원 이사장

저명한 미래학자였던 앨빈 토플러(1928~2016)는 「부의 미래」라는 저서에서 이른바 ‘혁신속도론’을 주장했다. 그는 "기업은 시속 100마일로 달리는데 노조는 30마일, 정부는 25마일, 학교는 10마일, 정치조직은 3마일, 법은 1마일로 변하므로 그 편차가 경제·사회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분석했다. 법의 변화 속도가 가장 늦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입법의 지연은 세상의 질서를 혼돈케 하고 발전을 저해한다. 따라서 국민의 대표자로서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원들은 법을 세상 변화에 적합하도록 신속하게 업데이트시킴으로써 국민들이 입법 지연으로 인해 피해를 보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작금 입법 지연 상황은 심각한 상태다. 두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첫째, 위탁선거법(정식 명칭은 ‘공공단체등 위탁선거에 관한 법률’) 사례다. 이 법은 농·축·수협 등의 임원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지도록 규율하는 내용(선관위에 대한 선거사무 위탁, 선거 절차, 선거운동 등)을 담았다. 

한데 이 법은 2014년 처음 제정될 때부터 불합리한 내용을 담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입후보자의 선거운동을 지나치게 규제해 ‘깜깜이 선거’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고, 현직 입후보자들에게 유리하고 신진 인사에게 불리한 내용들을 담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입후보자의 ‘알릴 권리’와 선거권자의 ‘알 권리’를 지나치게 제약하는 등 불투명하고 폐쇄적이며 비민주적 내용을 담아 ‘위헌성’이 있다는 주장도 학계에서 자주 제기됐다. 

또 3차에 걸쳐 전국 조합장 동시선거를 치른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여론의 질책과 언론의 비판이 있었고 토론도 있었지만(2023년 4월 12일 국회 농해수위 소병훈 의원 등이 주최한 좌담회 들), 아직도 위탁선거법 개정안은 수년째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한 상태다. 

특히 이 법은 소관 상임위가 행정안전위원회이기 때문에 소속 의원들의 관심도 크지 않은 듯하다. 이 법이 조속히 합리적으로 개정되지 못하면 내년 1월 실시될 농협중앙회장 선거도 종전과 마찬가지로 ‘깜깜이 선거’, ‘기울어진 운동장’, ‘폐쇄적·비민주적 선거’라는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될 우려가 크다.

둘째, 농협법(정식 명칭은 ‘농업협동조합법’) 사례다. 현재 농협법 개정안은 지난 5월 11일 소관 상임위(농해수위)를 통과했으나 법사위에 계류된 채 지금껏 처리되지 못한 상태다. 

개정안 내용 중 중앙회장 연임 관련 개정 내용(단임제→연임 1회 허용)을 현임자에게 적용할지 여부가 논란이 됐다. 일부에서는 이 개정안을 ‘셀프 연임 법안’이라고 비판하나, ‘셀프’란 ‘자신의 일을 자신이 처리한다’는 의미일 터인데, 이 법안의 발의자와 의결권자는 현직 농협중앙회장이 아니라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들이다. 입법권이 현직 농협중앙회장이 아니라 국회의원들에게 있기 때문에 ‘셀프 연임 법안’이란 말은 논리적으로 합당하지 않으며,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이 법안을 발의·의결하는 국회의원들을 모독하는 처사가 된다. 

한편, 현임자에게 연임을 허용하는 농협법 개정안이 최초 발의된 것은 20대 국회에서 이완영 의원 등 12인의 의원들에 의해서였는데(현 중앙회장의 취임 이전인 2017년 8월 31일), 이후 이 법안은 국회의원 임기 만료로 폐기됐고(2020년 5월 29일) 21대 국회에서 다수의 여야 의원들에 의해 또다시 개정안이 발의됐다. 즉, 중앙회장 연임 관련 농협법 개정안은 처음 발의된 지 6년이 넘도록 국회에서 가부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위에 본 바와 같이 현재 우리 국회의 입법 지연 상황은 심각하다. 앞으로 국회의원들은 내년 4월 치러질 총선 준비에 몰입해 입법 추진을 소홀히 할 우려가 있고, 내년 5월 의원 임기가 만료되면 계류 법안들은 모두 폐기된다(헌법 제51조 참조). 따라서 국회는 위탁선거법 개정안, 농협법 개정안 등 다수 계류 법안 처리를 시급히 서둘러야 한다. 국회의 입법 지연은 세상 발전을 저해하고, 국민에게 피해를 입히며,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가중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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