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당연하다고 배웠지만 살아가면서 꼭 그렇지만은 않음을 종종 느낍니다. 시시비비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인데, 자칫 서로의 감정을 다치게 해 관계가 틀어지고 급기야는 깊은 갈등과 분열로 치닫곤 합니다.

지인이 보내 준 글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았습니다.

옛날 어느 고을에 고집 센 사람 한 명과 똑똑한 사람 한 명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다툼의 이유는 고집 센 사람이 ‘4×7=27’이라고 주장하자 똑똑한 사람은 ‘28’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하자 두 사람은 고을 원님에게 가서 누가 옳은지를 가려 달라고 했습니다. 원님이 고집 센 사람에게 "네가 ‘4×7=27’이라고 했느냐?"고 묻자, 그는 "네, 당연한 사실을 말했는데 이 녀석이 28이라고 우기지 뭡니까?"라고 답했습니다. 이 말은 듣자 원님은 이렇게 명했습니다. "27이라고 말한 자는 풀어주고, 28이라고 말한 자는 곤장을 열 대 쳐라!"

곤장을 맞으면서 똑똑한 사람이 억울하다고 하자 원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4×7을 27이라고 말하는 놈이랑 싸운 네 놈이 더 어리석은 놈이다! 네 놈을 매우 쳐서 지혜를 깨치게 하려고 한다."

원님의 번뜩이는 지혜가 돋보입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반드시 시시비비를 가려야만 하는 경우도 많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예화의 경우에는 그것이 27이든 28이든 그리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4×7을 27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해 봤자 그가 이해할 리는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도 틀린 것을 바로잡으려는 똑똑한 사람의 행위는 거센 다툼으로 이어졌고, 결국 원님에게까지 가게 한 것입니다. 아무리 아는 게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때인지 아닌지를 구분하지 못했으니 어리석은 사람일 수밖에요.

그래서 조금은 져주는 것이 똑똑함보다 더 지혜로울 때가 많은 게 인생살이인 듯싶습니다. 「지혜」(스샤오엔)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옵니다.

친구 사이인 브랜든과 프랭크가 파티에 참석해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때 한 신사가 그들에게 다가와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그 일의 성패는 하늘에 달렸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 말이 성경 구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구절의 출처가 성경이 아님을 알았던 브랜든이 그 점을 지적하자 신사는 당황해하면서도 더 큰 목소리로 성경 구절이라고 우겼습니다. 그러자 브랜든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친구인 프랭크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때 프랭크는 테이블 아래로 브랜든의 다리를 툭 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브랜든, 자네가 틀렸어. 저분 말씀이 맞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브랜든이 "자네도 그 말이 ‘햄릿’에 나오는 말임을 알지 않은가?"라고 따지자 프랭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이지. 하지만 그 신사나 우리나 파티를 즐기러 왔어. 굳이 그의 잘못을 지적해서 자네가 얻을 건 뭔가? 그렇다고 자네를 인정해 줄 것 같은가? 왜 더 멍청히 굴지 못하나. 그렇게 곧이곧대로 말해서 그 사람 체면을 깎으면 그에게 미움밖에 더 사겠나."

굳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도 사실 여부를 가리려는 브랜든보다는 ‘파티를 즐기러 왔다’는 본질을 잊지 않은 프랭크의 태도에 더욱 마음이 갑니다.

살다 보면 똑똑함을 드러내야 할 때도 있지만 그 사안에서 한발 떨어져 관조하는 태도 역시도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겉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상황의 본질을 잊지 않는 관조하는 태도가 자신의 총명함을 빛낼 최고의 수단입니다. 논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그 논쟁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꿰뚫는 사람은 기꺼이 ‘져줄 줄’ 아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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