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구 전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교수
김상구 전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교수

가을 저녁 햇살에 억새 풀 머리숱이 하얗게 휘날릴 즈음이면 과수원의 사과는 부지런히 단물을 빨아들인다.

가을은 여름날의 치기 어림과 어깃장, 폭주와 폭염을 잠재우고 머나먼 길을 떠났거나 떠나려는 자들을 집으로 향하게 한다. 개간지 너머로 향하는 저녁 해는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한다.

바닷가 어스름, 빨랫줄에 매달린 말린 오징어 행렬은 짭짤함을 더해간다. 호숫가 언덕, 저녁 햇살을 맞으며 비스듬히 서 있는 산국화, 아무도 바라본 적이 없는 노란 꽃을 카메라에 담는다. 찰칵 소리에 놀라 고개를 끄덕이고, 카메라도 초점을 잡으며 삐빅삐빅 산 국화에 인사한다.

대추, 사과, 호박, 단풍을 곱게 물들게 했던 가을 해는 수평선 아래로 장렬하게 하루를 마감한다. 서쪽 하늘이 묽은 이유인가 보다.

오늘 하루도 카메라를 둘러메고 산으로, 들로 들꽃과 나뭇잎과 줄기, 햇살을 앵글에 맞추며 발품을 팔았다. 야생 들꽃은 여름날의 폭우와 땡볕, 천둥과 번개를 잊은 채 노랑, 빨강, 보라색으로 울긋불긋 단장했다. 앵글에 담아 파인더로 바라보니 신고(辛苦)를 견뎌낸 터라 더 선명하고 예쁘다.

산천을 미니 사이즈로 옮겨 놓은 석부작(石附作) 전시회에서 셔터를 눌러대고 있을 즈음, 어디선가 물총새 한 마리가 날아와 찬란한 날개를 펼치며 포즈를 취한다. 아! 이런 행운이! 물총새에게 감사함을 연신 날린다. 엔돌핀이 온몸에 퍼지고 산국화, 쑥부쟁이, 구절초, 벌개미취를 찾아가는 발길이 가볍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빛을 이용해 자연을 앵글에 담아내는 것이지만, 보이는 것을 찍는 게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걸 빛으로 그려낸다고 한다. 마음 속 진실은 눈에 보이는 사실보다 더 아름답다. 마음의 진실을 빛을 이용해 자연에 어떻게 담아낼까? 요즘은 포토숍까지 거친 사진을 사진으로 대접한다.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 아니 창조다. 회화는 캔버스에 하나씩 하나씩 그려나가지만, 사진은 덜어낼 것은 덜어내어 어느 한 부분에 프레임을 정하는 일이다. 미국의 비평가이자 「사진에 관하여」를 쓴 수전 손택도 사진 찍는 일을 프레임을 정하는 일이라고 했다. 

20세기 최고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가 쓴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는 소설가가 되려고 그의 고향 아일랜드를 떠난다. 해변가를 거닐던 학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언어로 창조할 수 있을까 상념에 빠진다. 언어를 벼려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하는 소설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굳힌다. 그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떠나기 전 대학에서 학장과 아름다움이 무언인지 미학 논쟁을 벌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것을 언어로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도 언어를 다듬고 다듬어 진부한 언어를 벼린다. 언어를 갈고 닦는 일만이 아니라 마음 속에 떠올리는 심상(心想)도 ‘낯설어야(defamiliarization)’한다. 진부한 언어와 심상들로는 ‘강한 시(strong poem)’를 쓰지 못한다. 시인은 훌륭한 시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나보다 앞서간 위대한 시인 앞에 주저앉아 어떻게 이 사람을 넘어설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미국 비평가 폴 드만은 말했다.

영국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는 호숫가 미풍에 흔들거리는 수선화의 장관을 보고, 수선화의 겉모양이 아니라 즐거웠던 ‘감정의 흘러넘침’을 담담한 언어로 그려낼 때 감동을 준다고 했다. 모든 예술은 내 마음의 진실을 드러내는 행위다.

사진도 ‘보이는 것을 찍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느끼는 것을 찍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 하나? 수선화를 보고 마음의 기쁨을 시로 탄생시킨 워즈워스처럼, 들꽃과 즐겁게 대화를 하며 길을 물어야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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